옛날이야기(추억창고)를 보면서 가슴아픈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저는 모태 신앙생활을 하고 지금까지도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시집을 와서 보니 시댁식구들 90% 가 교회를 안다니더군요
그러한 가운데서도 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식구들이 다 잠든 고요한 밤에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하며 실컷 울기도 했고, 때론 친정 아버지 묘소에 가서 울기도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답니다.
찬송가 376장 3절을 부르면서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견디기도 했고요
가정 사정으로 인해 큰 며느리가 되어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게 되었고 시아버님께서는 위암으로 고통속에 계실때에 일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병명을 알리고 죽음을 준비했을 텐데 옛날에는 본인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고 비밀로 붙이고 살았던 때입니다.
그리 넉넉한 가정은 아니라도 가정에 모든 생활이나 경제가 시아버지의 건강으로 촛점을 마치고 살았으므로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지만
아이들(남매)에게는 먹을것(간식) 대신 동화책 읽어주며 옛날얘기 들려주면서 키웠었는데.....
집안에 어른이 아프시니까 시댁 식구들의 병문안이 자주 있었어요
오시면 과일정도는 들고 오시지만 병명을 모르고 계시는 환자 앞에서 환자의 아픈 내용을 들으신 시댁 식구들은 그렇게 아플때는 이런 약이 좋다 저런약이 좋다 하시면서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가시면 시아버지께서는 들은대로 다 약을 (좋다는 것은 다) 해달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쩔수 없이 며느리로서 다 해드리면 바로 토하시므로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아시겠지만 위암은 굶어서 죽는것 이더라고요)
우리 부부는 시댁 식구들에게 아버님 못들으실때 설명을 했어도 잘 통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힘이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시댁 식구들이 병문안을 오셔서 저에게 돈 5,000원을 내 놓으라면서 큰 며느리가 교회를 다녀서 무슨 약이든 써도 안낳는다고 하시며 절에다 며느리가 주는 돈으로 불공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참고 있었던 내가 무슨 용기가 났었는지 시댁 어른들 앞에서 "그런 돈은 못드립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한번은 죽습니다.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이나 말입니다. 교회 다닌다고해서 죽고 절에 다닌다고 해서 산다면 그렇게 절에 열심이었던 육영수 여사는 왜 총알이 비켜가지 않고 직통으로 맞아서 죽었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얘기가 불쑥 나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육영수 여사님의 죽음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에게 총에 맞아 죽으셨던 그해 겨울에 저희 시아버님도 돌아가셨음)
그러나 지금 저희 시댁 식구들은 80% 정도가 신앙생활을 하신답니다.
물론 5,000원 내라고 하셨던 분도 말입니다.
지금 저는 시댁 식구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살고, 그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에서 호스피스교육도 받고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지금은 병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