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277

변두리 삶의 이야기 (29) 노래를 불러본다. 둘


BY 영광댁 2001-05-17


노래를 불러본다(둘)

어머니들 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꽃이 피어 있고 만물이 활개치고 있는 산하. 겨우내 비워져 있던 논에 물이 들어가 있고
쟁기를 밀고 가는 소와 주인이 한 호흡이 되어 써래질이 한창인 들판이 차창으로 지나쳐 간다. 고등학교 학생의 잘 깍여진 상고머리처럼 잘 자라고 있는 연푸른 색의 못자리터나 못자리 물을 보는 주름진 얼굴이 확대되어 인화된 사진을 보는 듯 가깝고 먼 거리에서 길가에 심어진 가로수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저 얼굴들은 잊혀지지 않을 우리들의 아버지며 오라버니며 동생인 걸

해마다 늘 그날에 나서 보았던 길을 일주일 늦춰서 나가본 길을 또 시대탓을 하랴.
아버지 기재일을 1주일 넘기고 나섰다가 두 아이를 앞세우고 돌아오는 길가에 자운영꽃이 한 뜰이다. 시계를 만들어 팔뚝에 매었던 토끼풀 꽃도 피어나 길섶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들 듣는다. 어느 해 봄날 만개한 토끼풀 꽃을 한 아름 띁어다가 방안 꽃병에 둔 일이 있었다.
그 볼품없는 꽃에서 나오는 향기가 너무 은은하고 좋아서 욕심을 부렸던 것인데 하룻밤을 넘기고 나자 아차 실수 했구나 고개를 저었다. 그 꽃속에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었던지 꽃병 아래 새까맣게 살아 있는 것들이 기어나와 갈곳 몰라 하는 것을 보았으니. 내 코의 향기만을 중시했지 감히 그 꽃 아래 그렇게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이 손을 잡고 있는지는 예전에 몰랐던 것이다. 그후론 세상의 모든 꽃들을 한발짝 떨어지거나 멀리서 보고만 온다. 내 창가에서 키우는 것 말고는...

짙푸른 색으로 잘 편 보리밭을 지나가는 바람이 꽃뱀꼬리도 닮았더라. 봄이 내게 고자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푸른 들판에서 푸르게 푸르게 나오는 것들에 대한 푸르지 않은 내 세월에 대한 시샘탓일껄. 문득 어머니들의 눈물많았던 보릿고개의 슬픈 사연도 떠오른다.
저렇게 보리가 피었을 때를 보릿고개라고 하였을게다, 아 그때 들판엔 나물들이 나오는 즉시즉시 누구네집 솥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던가. 아니면 검은 무쇠솥 커다란 솥안에 나물밥이 한창이였다는 것도.. 종일 보리밭을 매고 나면 보리쌀 반되를 받아왔다고 하시기도 하셨을걸. 차창으로 이젠 보릿고개도 넘어가고 서울이라 하면 늘 낯선 이름만 같더니 아이들을 낳아 키운 지 10년이 되었으니 이젠 낯선 이름도 아니고 아이들에겐 고향이 되었건만 어쩐 일인가 늘 어머니 땅만 모두의 고향만 같아,


그 언젠가 어머니들도 이 땅을 뜨실 것이고 ,아이들 데리고 먼지 뒤집어 쓰며 돌아갈 곳도 없어진 시간이면 하마 나도 시름많았던 이땅을 떠날 것이리. 노환과 외로움에 짧은 봄밤도 잠 못 이루고 사시는 어머니께 고단한 어머니 세월 먹어 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세월 먹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 한 이부자리에서 단하룻밤 보내고 돌아서 오는 길에 남도땅에서부터 시작한 봄비가 서울에 닿을때까지 그치지 않더라. 싹들의 돋움을 위한 단비건만 설움 많은 사람들의 드러내고픈 가슴이였단다 하면 알까 당신. 사랑하는 당신.


가만 노래를 불러보았어.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아침이슬을, 한계령을, 이명으로 들려오는 성주풀이를. 가슴으로 불러보지만 가슴을 태우게 하고 마는 어머니은혜 노래를 그렇게 가만히. 어버이 은혜가 아니고서야 내가 어찌 이렇게 가난한 날의 행복을 엎드려 적으며 살 수
있으리.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사는 삶을 건강하고 경건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리.

돌아온 지 벌써 며칠짼데 가슴속에서 골골골 하던 마음삭임내가 머릿속 뼈속으로 스며 들어 갔을까? 사랑받고 있다는 표시로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 소리를 유난스레 깊어진 내 봄앓이로 대신해보고 있다.골골골 기침을 하다가 ,참아보려고 갸르릉대다가 마침내 길가에서 오금을 모으고마는 시든꽃이 되어가고 있는 나.


나도 한때는 간간이 외롭고 쓸쓸한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젊은 내 어머니들의 어여쁜 ,
교복입은 꿈만 있었던 막내딸이였었는데,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삶의 추녀밑을 지나다가 마침내 보고 마는 찔레꽃. 이제는 찔레꽃 향기로나 살아가 볼까?
그 가없이 얇고 신신한 홑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머님들.
살아계시는 동안 건강하시기를....

(가난한 날의 행복.31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