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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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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이 곰팡이가 슬어 돌아왔다.


BY hyesol 2001-05-17


사업에 실패한 가장이 부도를 내고 잠적해 버리자 남은 우리 가족들은 혹독한 가난
속에서 형벌처럼 살아야 했다. 지금부터 16년 전의 일이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고 법의
으름장에 가슴 죄고 먹고살고 집세 내고 아이들 키우고 그러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삶이 아이들이 초등학교 상급생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 집에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나는 진작 깨달은 바가 있어서 늘 아들에게 간곡하
게 당부하곤 했다.
"반장 같은 건 못 해도 괜찮다. 그저 바르고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
그 아들이 육 학년이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아들에게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하라고 권
했다. 성화에 못 이겨 아들이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그 결과 아들이 부회장에 뽑혔다.
회장은 다른 반에서 출마한 여학생이 되었는데 퍽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로 담임 선생님이 몇 차례 전화로 학생회장과 부회장은 전체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해
야 한다고 당부를 해왔다. 우선 한번도 해보지 않은 그 많은 선생님들의 대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남편은 집에 없고 내가 여기 저기 일거리를 찾아다니면서 먹
고살던 때였다. 어찌됐건 선생님들을 모두 대접하기에는 내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며
칠 동안 애를 태우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학교로 불러냈다. 담임선생님은 입장이
몹시 난처하다며 나를 주임선생님에게 인계했다. 나는 빈 교실에서 주임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주임으로부터 대강 얘기를 듣고 났을 때 울컥 서럽고 분한 생각이 들기도 했
다. 그러나 암말 없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못박듯 말했다.
" 회장 부모님은 벌써 워커힐에서 선생님들을 모두 모셨습니다. 모두에게 섭섭잖게 거
마비도 드렸구요. 정말 성의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교육부 장관상 받은 거,
그것도 아드님이 그냥 잘해서 받은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어머님이 성
의를 표해야 합니다. 다 학생과 어머님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해 정말 부끄럽습니다.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토요일 오후였다. 주임선생님과 헤어지고 걸어나오는데 운동장에서 육 학년 선생님들
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
랐다. 잰걸음으로 운동장을 벗어났을 때 나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며칠 후 봄 소풍
날이 왔다. 부회장의 어머니가 된 나는 백방으로 돈을 구해서 도시락을 정성껏 마련했
다. 담임선생님 도시락은 특별히 삼단 도시락을 만들었는데 맨 아래 칸은 김밥과 유부
초밥, 둘째 칸은 찰밥, 셋째 칸은 닭과 새우로 만든 요리를 정성껏 쌌다. 또 별도로 선
생님들의 맥주 안주를 만들어 호일로 싸고 리본을 둘렀다. 아무튼 그날 음식
냄새에 침을 흘리던 아이들의 손길을 다 물리치고 그 도시락은 아들의 손에 들려 그렇
게 소풍을 갔던 것이다. 그런데 삼일 후에 그 도시락이 돌아왔다. 아들은 들고 온 도시
락을 어머니 앞에 내밀었고 어머니는 묵직한 것이 이상하다 느끼며 도시락을 풀어 보
았다. 도시락 안에는 푸른곰팡이가 가득 슬어 있었다. 음식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깜
짝 놀라 한참동안 우리는 서로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도시락 바닥에는 잘 버릴 수
있도록 호일까지 깔았는데 어찌하여 선생님은 상한 음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돌려보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무렵 동사무소에서 밀가루를
한 번 타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 밀가루 포대를 방 가운데 놓고 ' 몇 년 몇
월 몇 일 어머니가 도움을 받다' 라고 매직으로 썼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장래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어머니가 오늘 받은 이 도움을 수천 수만
배로 불우한 이웃 사람들에게 갚아야 한다."
그러한 일도 있고 난 후여서 나는 도저히 묵과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이 나라 장래
가 심히 염려되었다. '옳은 일에 물러서지 말자.' 나는 교육부 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선
생님을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를 제
시하기 위해서였다. 교사들의 자질 향상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때론 재교육이 필요하다
고 나는 역설했다. 가난한 학부모를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는 문제 교사를 질타했고 공
정한 교육의 기회를 앗아가는 촌지 문제를 거론했다. 물론 학교와 내 주소와 이름을 떳
떳이 밝혔다. 며칠 후 나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교육부가 이 사건을 조사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 것을 알았다. 내 주위가 발칵 뒤집혔다. 장학사들이 찾아와서 사건 경위를
조사해 갔다. 선생님들이 줄줄이 교육청에 불려가서 사건의 전말을 해명했다. 담임은
말할 것도 없고 교장 선생님까지 찾아와서 모든 사실을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지역 유지들도 찾아와서 내가 교육부에 소명했던 사실을 번복해 달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나더러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럴 순 없다고 나는 끝까지 버
텼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처벌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교육부 장관에게 다시 편
지를 썼다. 학부모들도 나를 두둔하는 쪽과 그렇지 않는 쪽으로 갈렸고 나는 그 사이에
서 십자가를 져야만 했다. 얼마 안 가서 교육부가 방학기간을 이용, 교원 연수원에서
교사들을 재교육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게 됐다는 보도를 들었다. 작은 보람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시끄러운 도시락 사건 이후에도 나는 떳떳하게 아이들을 계속 그 학교에 보
냈다. 그때 만약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철통같은 신념 같은 게 없었다면 나는 나머지 두
아이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켰을 것이다. 촌지란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에게 공정한 교육을 하기 어렵게 만들고 많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이란 자칫 잘못하
면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냥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무거워지기 십상이다. 그
러나 생각해보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학년이 바뀐 후에 언제나 지난해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 감사했다. 그때 가서 정성어린 선물도 전했다. 그럴 때 서로 주고
받는 마음이 참으로 순수하고 따뜻한 것을 알았다. 부모의 작은 실수로 아이들이 선생
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나 않을까 늘 조심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고 어떻게 아이
들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이들 앞에서는 선생님을 헐
뜯거나 욕하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로 기르기 위해 늘 선생
님의 훌륭한 점을 말해주고 그 은혜에 감사하도록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서 스승의 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종종 아이들과 함께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초등학교 일 학년에 다니던 막내아
이가 임신 중인 담임선생님이 쉴 시간에 자주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요구르트
하나를 사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선생님 힘드시지요. 이거 드세요' 하고 내밀었다. 그
여선생이 이 아이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겠는가. 그러니까 그
도시락 사건 이후에도 내 두 딸이 변함없이 그 학교에 다니며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
되었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
은 당연하다. 스승의 노래를 부르며 선생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어머
니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했고 늘 그것을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
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커다란 교훈이 된다. 만약 이 도시락
사건도 내가 학교나 다른 학부모들 등쌀에 그냥 못 본 체하고 넘어가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절망과 좌절만을 맛보았을 것이다. 정직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세야말로
가난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또한 자식 교육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