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신엄마,
지금은 12시가 넘었고, 그러니깐 오늘은 화요일이야.
이따가 정오쯤 현신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갈거니깐,기다리고 있어.
이쁘게 환자복 입고 이쁜 얼굴하고...
라마순인가 하는 태풍이 지나가느랴고 전국이 바람과 비로 들썩들썩 하더니 오늘은 저녁내내 아주 시원한 바람이 불대.
현신엄마가 입원해 있는 그 병원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겠지?
판교 인터체인지를 조금 벗어나면 있다는 그 병원은 처음 가보는 길이겠지만 아저씨 말씀이 찾아오기 쉽다고 하니깐 현신엄마를 좋아하는 울 남편이랑 함께가볼게.
기말고사 시험이 끝난 아들녀석 학원 문제로 요며칠 여러가지 방법으로 고민을 하다가 오늘 중대한 결정을 내렸지.
그리곤 학원에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어.
"우리 형준이 수학선생님 구했거든요. 오늘부터 못가요.
3개월치 낸 것중에서 한달만 공부했으니 두달분은 환불 되는거죠?"
그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어.
진짜루 수학선생님 구했냐구?
치~~ 잘 알면서. 짠순이 엄마가 수학선생님을 집으로 모실리 있어?
그 학원 말야, 수학공부에 일가견 있는 형준이를 월반 시켜준 것까지는 고마웠는데, 여름방학 내내 월~금욜까지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공부를 하겠다지 뭐야?
그래서 며칠 고민을 했지만, 동생말따나 뭐 공부가 인생의 전부도 아닐테고, 그렇게 공부 잘 해서, 유수한 대학을 나오고,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행복하냐??? 그게 아닐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과감하게 학원을 뚝! 끊어버린거야.
나 정말 잘했지?
뭐 포항공대에서 일년에 한,두번씩은 꼬옥 자살사건이 있다나?
그렇게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얘기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그 얘길 해 줬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정말 기뻐서 펄펄 뛰는거야.
정말 좋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정말 즐거운 여름방학을 지낼 수 있을거라고 말하면서....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관두고 왜 학원으로 밀어넣으려고 했을까...
이렇게 내가 결론을 내리기까지에는 현신엄마가 한 몫 한 것두 얘기할까?
현신엄마,
그렇게 건강했고, 그렇게 이쁘고, 그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끓일 줄 아는 현신엄마!
수영을 해도 나 보다 훨씬 잘해 마치 물위를 나는 제비처럼, 날아다녔던 모습 (정말 물 속에서 날아다니는 느낌이었어....), 사우나실에서 냉탕으로 수십번을 오가도 하나두 지치지 않았던 현신엄마의 체력, 두 아이 엄마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늘씬한 몸매, 전라도 여자의 특유의 맛깔스런 음식들.....
그랬던 현신엄마가 병에 걸리리라곤, 이렇게 큰 병 땜에 오래 고생하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현신엄마가 병에 걸리고 차츰 지쳐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 바뀐 것 중 하나는 예전보다 청소에 많은 시간과 비중을 두지 않는거지.
깨끗하게 정돈하고, 청소기 돌리고 눈에 띄는 지저분함만 없음되지
쓸고 닦고 문지르고, 후벼파면서까지 청소하는 시간들이 여자들에겐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야?
그래..... 어쩜 언제 어떻게 될 줄도 모르는 인생인데 너무 사/소/한
것 때문에 시간을 버리고 있었구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어쩌면 아이들이 커가는 이유도 이유이겠지만, 공부라는 미명하에 학원에서 시간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일거야. 대화의 시간도, 함께 마주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여유도, 하루의 일과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눌 아름다운 사랑을 뺏앗기고 있는거라고 생각해.
왜 살고 있는건데....
현신엄마,
어떤 목사님 말씀이 우린 언젠가는 다 죽는대.
지금 살고 있는 목숨이 마치 영원할거라고 생각하지만, 영원할 것 처럼 욕심을 부리고, 미련을 갖고 있지만 우린 한결같이 매일매일 촌각을 다투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래.
정말 그래?
정말 그....래....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시간에 호사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든거야.
나를 위한 시간, 내 가족을 위한 시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생각하게 된거야.
우리 각자에겐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은걸까?
현신엄마 앞에 주어진 시간과 또 내 앞에 주어진 시간.
어느 누구의 시간이 결코 길다, 짧다를 얘기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한 마음으로 살았는가, 어떤 사람이 더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았는가에 있는건 아닐까?
이따가 만나.
만나면 이렇게 죽음과 삶에 대한 무게있는 얘기들은 현신엄마의 맑은 눈이 너무 두려워서 피하고 싶을지도 몰라.
그제 죽을 잘 넘기고 있는지, 고통은 덜한지, 피 주사 맞는 일이 괴롭지는 않은지, 새로운 병원이 편안한지, 옆에서 간호하는 아저씨는 지치지는 않으신지, 아이들은 잘 다녀갔는지, 월드컵은 잘 보았는지...
어떤 말이 현신엄마를 위한 말이 될지 난 가슴이 답답하고 무기력증을 느끼게 되곤 해...
다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
현신엄마,
오늘 밤 편안하게 잘 자.
자는 동안에만 생긴다는 면역세포들이, 샘물 솟듯이 펑펑 솟아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안녕..
좋은 꿈 꾸고...
2002. 7. 8. 늦은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