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연륜이 있어보이는 검푸른 나무들이
이른 더위에 지친 가파른 숨길을 식혀준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다.
물김치를 담는다고 동생댁과 둘이 오손도손 양념을 다듬는다.
열무, 붉은 고추, 파, 양파, 마늘, 생강, 밀가루 풀, 액젓 조금, 소금...
어머닌 앉아서 구경만 하시라고 해도
연신 거들고 나서신다.
"표 안 나는 살림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아나?
돌아서만 아~들 삐들가 놓지,
해도해도 끝도 없지...
야(동생댁)는 사표내라고 해도 내 말을 안 듣는다."
"엄마, 직장 몬 구해서 난리인데
이십여 년을 댕긴
그 좋은 곳을 말라꼬 그만둬요?"
"노인정에 가보만 집안 살림살이에서
손 놓았다는 할매들이 내사 마 부럽다.
힘에 부치고하니께 인자 귀찮은 마음이 앞선다."
믹서기에다 양념을 설갈아
귀동냥으로 들었던
충청도식으로 담아주마고
팔을 둥둥 걷어본다.
"세상에 젤 불쌍한 사람이 할 일 없는 사람인 기라요,
할매 손길 필요하다는 손주있겠다,
내 손으로 꿈적거릴 근력있겠다...
할 일 없이
눈치밥 얻어 먹는 고런 할매보다
큰 소리치미 사는 우리 어무이가 더 낫심다."
팔팔 끓인 풀에 냉수를 섞어 미지근해지면
양념을 넣어 소금으로 간간하게 간을 맞춘다.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열무 위에다 짧짜롬한 양념을 살살 붓는다.
어느새 다 삶긴 빨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신다.
"어머님, 내비 두세요, 제가 할께요."
동생댁이 말리보지만 잽싼 어머니의 손길을 못 따라간다.
"엄마, 기왕 해주는 거 유셀랑 하지 마이소!"
"저카시다가도 화내실 적엔 '니 팬티까정 빨아줬다' 고 하시는 걸요."
동생댁이 이 참에 속마음을 끄집어낸다.
잘박잘박 다 된 열무김치을
새콤한 맛이 들도록 베란다로 옮긴다.
기숙사에서 저녁에 외가로 온다는 우리 아들때문인지
동생댁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간다.
다시 오붓한 모녀만의 시간이다.
마지막 다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