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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삶의 이야기(25)


BY 영광댁 2001-04-24

딸과의 동행

아이와 함께 돌아오는 해걸음 버스안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몹시 상쾌하다.
본격적인 퇴근시간이 되기는 아직 이른지 집으로 돌아가는 교복입은 학생들이
절반을 차지한 버스안에 4학년 딸이 편안한 얼굴로 앉아 있다.
다소 설레어 보이고 다소 흥분해 보이기도 하고 다소 기뻐보이는 옆얼굴.
맞은편에서 그런 딸을 바라보는 나도 아이와 같은 그런 마음이 있기는 마찬가지.
문득 가슴을 쓸어내려 가는 이 알싸한 슬픔도 같고 기쁨도 같고
서러움도 같은
마음이 한줄기 회오리바람처럼 스쳐지나 간다.

4학년이 되도록 옷가게에 가서 키 맞춰 보고 색깔 맞춰가며 입혀보고 돌려가며
옷을 사입혀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꼭 필요한 것들은 길지나가다 노점상에서 눈에는 안들지만 가격에만 마음에 드는
옷을 두서너가지 사다입혔을 뿐. 혹은 속옷들이나 양말들이나...
나머지는 아는 사람들 집이나 같은 서울 하늘아래 사는 언니네 집에서 가져다가 계절에 맞춰 키에 맞춰 입혀 키운 것 같고 그렇게 일없이 아이는 자란 것 같다.
아이에게 맞지 않은 옷들을 들고 올땐 "언제 키워 이 옷을 입힐까"를 얘기했다가 "얘 너 어서 커라". 그랬다가, 울컥 하니 서러움이 들때만 해도 삶이 내게 무난하였으므로 욕심이 과하구나 한발 뒤돌아서기도 했던가.
이제 어슬막이 큰 아이가
"이거 언니옷이예요"" 이거 오빠옷이예요"? 할땐
"당연하지" 거기까지 대답하면 "허긴...언니옷 동생이 안입으면 누가 입겠니?
언니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시지요? 하면서 피식하니 웃었다.
어느 한때는 언니네 아이들이나 내 아이들이 너무 차이가 나서 언제 키워 입히겠니? 했는데
어느결에 보니 내 아이들이 너무 빨리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만다.
그나마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 살림에 옷값이 그렇게 만만하기만 한 가격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람단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이길 수 없어 그러자 해놓았는데 아이가 들고온 준비물들은 단복부터 시작하여 야영장비까지가 빠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고만 가슴을 덜컥 내려 앉게 하고 말았다.
호강시키며 키우지는 않아도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정도는 시키면서 키우고 싶었던 꿈을 가지고 살았으나, 돌아보니 제대로 못 일궈준 날들이 태반들인데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 낫다 하고선 기왕에 시작했으니 고름이 살 안된다고 가자 아람상사가 어디에 있데니.... 아이를 앞세우고 길을 나선 어느 날 오후.
봄 바람이 가슴으로 들어와 바람을 일으킨다.
아! 바람이라. 바람이나 나 볼까,
사람 사는 바람이나 나볼까, 산으로 가면 산바람이고
길을 오래 걸으면 길바람이지, 어쩌자고 바람이라면 남녀가 정분난 것만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냐.
간간히 혼자서 바다에도 다녀오니 나는 바닷바람도 잘 나고 산에도 뱀처럼 쓰윽 다녀오니 산바람도 잘 난다.
그래 오늘은 딸 바람이다.

단복, 하복, 평상복 , 우비 , 배낭 , 침낭, 등등...
가장자리로 가서 단복도 입혀보고 하복도 입혀보고 치마 바지도 입혀보고 우비도 입혀본다.
이쁘다. 정말 . 지지배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 맨날 엄마 몰래 코딱지나 파먹는 줄 알았더니... 제 몸에 맞는 옷을 입혀보고 돌려보고 서너발짝 떨어져서 봐도 제 폼에 맞고 제 얼굴에 어울린다.
딸은 연신 벌린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르고 방글방글 웃기만 하는데 내 가슴이 문득 뜨거워지면서 고만 눈물이 나도 모르게 자르르 흐르고 만다.
참 못나기도 한 이 가난한 엄마.

계산을 치르고 여러 가지 물품들을 배낭에 집어 넣고 제법 큰 그 배낭을 딸이 등에 지고
길을 나선다. 이쪽에선 저물고 지구의 반대쪽에서는 떠오르는 해가 딸의 등에 배낭처럼
매달려 있다.
그래, 꿈이나 희망이란 어쩌면 저런 자연의 순리인지도 모른다.
가슴속에 있다가 다른 질곡속에 있다가 이윽고 드러나 등에지고 가는 것
내 등에 있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붉은 피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피어오르기도 하는 것.
삶은 피어오르기 위해 견디는 그런 순간들의 연속에서 꿈과 희망이라는 세포가 내 몸안에 피톨처럼 살아 있어 108번뇌까지 소화시키며 사는 것은 아닐까?
딸아. 이 가난한 엄마의 배부른 행복이 문득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진 않느냐.

가자,
이 황혼길을 엄마랑 같이 어느 정도 걸어가면 네게 산뜻한 아침이 오리라.

2001.04. 24 일 새벽
(가난한 날의 행복.25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