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며칠이 지나서 나는 의기양양한 시누이의 전화를 받았다. 띠가 같은 정도의 한참 위 손위 시누이라서 좀 어렵긴 해도 언제나 작은 할머니 쯤으로 아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는 고마운 시누이였다.
"얘, 내가 너희들 강아지 부탁해놓은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하나 가져가란다. 버릇도 잘든 2년된 강아지(?)라서 대소변 훈련도 필요없다는데 언제 올래?"
아뿔사, 강아지 때문에 갈등중이건만 연방 수다를 떨어댔지 정작 안키우는 쪽으로 수습이 된 건 전달을 못한 모양이었다. 점점 죽어가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눈치빠른 아이들은 축제분위기였다. 더구나 한 건수 올린듯한 큰 시누의 들뜬 음성에 찬물을 끼얹긴 더 힘든 노릇이었다.
"언제 서울갈 때 가져갈게요."
마지못해 약속은 했지만 머리가 아파져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엎지러진 물이었다. 이미 어쩔 수 없이 가져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끊지 않았는가. 40만원이나 한다는 강아지를, 더구나 대소변 훈련까지 잘 되고 불임수술까지 했다는 강아지를 공짜로 준다니 이 김에 양잿물 마시는 기분으로 '열고'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하루이틀 미루던 서울행을 드디어 감행했고 자리를 옮겨 마음이 불안해진 밤색 푸들 강아지를 무릎에 앉히고 강아지의 뜨뜻한 체온을 떨떠름한 부담으로 느끼며 아이들이 목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곳 대전으로 두시간이나 우울한 운전을 해야했다. 불안하기는 자리를 옮기는 저나 새식구를 맞는 나나 피차 일반이었다. 우리는 서로 신경이 곤두서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달랐다. 무슨 일생 과업을 이룬 양 기뻐 날뛰었다. 불행히도 여름내내 강아지를 기대하던 우리집 꼬마는 동물적 본능의 가치판단으로도 깐히 보여 사납게 짖어대는 그 놈을 피해 소파 꼭대기에 올라서서 슬픈 첫대면을 해야만 했지만 나만 빼고는 다들 행복하게 새식구가 있는 첫밤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행복감에 동참하지 못하는 비밀스런 소외감이 밀려왔다.
아이들은 당장에 바빠졌다. 강아지의 심리상태가 당분간 불안하니 쓸데없이 친구들 데리고 오지 말라는 엄마의 엄명을 받았으나 간지러운 입을 하루종일 단속하기에는 가슴이 너무나 벅찼던 것이다. 2시에는 꼬마아이 친구들이 세명 딸려왔고 2시 반에는 딸아이의 친구가 두명이나 경비실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낯선 아이들과 바뀐 환경 탓에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달래랴 강아지를 사이에 두고 아이들 간에 벌어지는 싸움을 진정시키랴 나는 매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교통정리에 바빴고 나날이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우리집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이 충만해지는만큼 내가 할 일도 많아졌다. 오들오들 떠는 놈을 위해 목도리를 잘라 옷도 만들어주었고 아침저녁 데리고 나가 찬바람을 쐰 탓에 걸린 콧물감기 치료도 바빴다. 자세히보니 털이 빠진 곳에 피부병도 있었고 덧니 때문에 치과도 가야할 것 같았다.
마당에서 어릴 때 키우던 똥개말고는 키워본 일이 없는 터라 나는 집 앞 동물병원에 찾아가서 처음부터 강의를 들을 것 천지였다. 키워본 사람은 다 제 깜냥따라 편하게 키우겠지만 2KG도 안되는 비실비실한 강아지를 오자마자 죽인다면 아이들의 심리적 상처를 생각해서라도 안될 말이었다. 막내아이 이후에 잊어버리고 있던 육아수첩같은 걸 들고
동물병원과 애견용품센터를 드나들었다.
세째 아이는 부의 상징이라더니 바로 강아지가 그랬다. 애 아플 때 3천원이면 끝나던 병원비가 개는 3만원이란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기도 전에 새로운 돈 쓸 일이 거푸 생겼다. 40만원 개가 공짜로 생겼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주일 쯤 후에는 뼈저리게 느꼈지만
나만 빼고는 아무도 그런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개 피부병은 꼭 낫게 해주라는 남편의 지시대로 동물병원 가서 개 목욕시키고 털 깎이고 약 받아 5만원 내고 나오면서 내 꼴을 거울로 슬쩍보니 가관도 아니었다. 아침부터 머리도 못감고 무릎나온 바지에 보풀이 생긴 스웨터를 걸치고선 미용을 끝내고 머리에 리본까지 단 푸들을 팔에 모신 영락없는 개어멈 꼴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여태 반기는 사람 없어 집에 못들어왔던 사람처럼 벨소리와 더불어 쏜살같이 달려나와 안아달라는 강아지 땜에 집에 올 맛이 난다는 소릴 귀에 거슬리도록 했고 그럴 때마다 난 "내가 여태 개만도 못했단 말이냐?"고 유치한 자리다툼을 벌였다.
자기 무릎에서 곤히 자는 강아지가 깰까봐 안 움직이고 심부름을 시켜대는 남편에게 눈도 흘기고 잠자리에 누워서 너네들은 모두 재미만 보고 나만 죽도록 뒷치닥거리시킨다고 시간만 나면 생색을 내며 궁시렁거리는 동안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