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님의 "아가"(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꼭대기까지 촘촘히 박힌 판잣집들
많아야 방두칸과 작은 부엌
그리고 뒷간과 손바닥만한 마당이
흔한 울타리없이 도심을 향해 해바라기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리라...
그러나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 나올수 없는 미로처럼
얼키고 설킨 거미줄같은 골목길들.
그곳에 갈때면
계곡에 길게 걸친 흔들리는 낡은 나무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때는 왜 그리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는지.
아득한 계곡은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뱀의 아가리처럼 무서웠습니다.
그 다리가 너무 무서워 어쩌다 친구네 집에 놀러갈때면
먼길을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
산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좁다란 산길.
그 길은 하꼬방 사람들이 물길러 옻샘으로 가거나 또랑으로 갈때.
그리고 내 친구들이 학교로 가는 유일한 길이였습니다.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려 쪽을 지고
듬성듬성 빠진 이빨을 들어낸 채
헤프게 웃어대던 아리영자
몸배바지에 앞섶이 긴 꾀죄죄한 저고리를 걸치고
물이 철철 넘치는 동이를 이고 절름거리며 걸어가는
아리영자의 모습도 그 길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았던 풍경이였습니다.
집에 당도하면 동이에 담겨진 물이 얼머나 남아 있을까...
그래도 다행이 일할수 있는 팔은 멀쩡했습니다.
우리는 다닥다닥 붙은 똑같은 모양의 집중에서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구와 살아가고 있는지, 애기는 낳았는지
그런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영자만 나타나면 서슴없이 돌팔매를 해대며 골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각설이 타령에 아리영자를 집어 넣어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습니다.
"얼씨구 돌아간다. 절씨구 돌아간다.
작년에 왔던 아리영자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볼때마다 놀리고 놀려대도
아리영자는 우리에게 성난 얼굴을 보여준 적 없었고.
우리가 던진 돌맹이가
그녀의 몸 어딘가를 맞혔던 기억 또한 없었습니다.
그날도 무척이나 더운 여름날이였습니다.
시원한 물이 콸콸 흘러가는 또랑에서
빨래하는 아줌마들 지청구소리를 들어가며 정신없이 물장구를 치는데
갑자기 종아리가 따끔하게 아팠습니다.
비쩍마른 종아리에 붙어 피를 빨고 있는 새까만 거머리.
금방이라도 내 살속으로 파고 들을것 같아
호들갑을 떨며 빨래하는 아주머니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줌마 거머리 좀 떼주세요. 잉잉잉.."
아줌마도 징그러웠던지 빨래 방망이로 거머리를 떼려했습니다.
착 달라붙은 거머리가 뭉퉁한 방망이로 떼어 지겠어요?
떨어지지 않자 나는 더 크게 울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안중에도 없던 아리영자가
저만치서 빨래하다 말고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실실 웃어가면서 어눌한 말투로.
"이리와 봐 내가 떼 줄께~~"
나는 처음으로 그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통통해 진 새까만 거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확 잡아 떼는 아리영자는
그날 내겐 구세주였습니다.
무슨 심사인지 입안에서 뱅뱅 도는 고맙다는 말 대신
돌맹이 위에서 꿈틀거리는 거머리만 돌로 짓이겼습니다.
그일이 있은 후
나는 그녀를 두번 다시 놀려댈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어쩌다 마주치면
아는체라도 하면서 무슨말이건 하고 싶은데 주뼛주뼛거리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몇년전 굵직한 목소리의 남자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낯선 남자
가슴이 두근두근 아줌마 특유의 억센 억양은 간곳없고
목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풀피리 같은 나긋한 소리로
"누구신가요?"
"안무명입니다."
아니 안무명이고 김무명이고
문자 그대로 아는 남자라곤 없는디...
아니다 다를까 초등학교 동창회 한다고 총무가 전화한거였습니다.
두근거리던 가슴도 잠시
궁금했던 옛날친구들 안부를 물어 보았습니다.
고향 사람과 연애해서 시집을 갔는지
그곳에서 세탁소를 하며 산다는 마음씨 착한 옥희와
이발소를 차려 동네 사람들 머리 깎아 주고
한가할땐 느긋하게 장기나 두면서 살아가는 무명이만 남아 있을뿐
대부분 하꼬방을 떠나 도회지로 뿔뿔히 흩어졌답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아리영자가 생각났습니다.
내게 마음에 빚이 남아 있는 사람
"너 아리영자 생각 나니?"
"그럼 알고 말고, 도라지 아줌마라고도 하지.
"아니 아직도 살아계셔?"
"그럼 우리집 곁에 사시는데."
"혼자 살아?"
"그럼 혼자서도 얼마나 잘사는데."
아니 어떻게 그몸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왔을까...
아리영자는 종이를 줍고 병을 주워
고물상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 왔답니다.
욕심을 모르고 종이 줍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
그러다보니 은행에 예금까지 할 돈이 생겼고
고향사람들과 더불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