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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그루의 굉장한 목련나무 아래에서


BY allbaro 2001-04-17

다섯 그루의 굉장한 목련나무 아래에서

잠시만 몸을 담그어도 눈자위까지 푸르게 가라앉히곤 하는 서울
에서 조금 먼 곳에 와 보았습니다. 금새 회색의 얼굴을 한 도시
는 백미러를 따라 사라지고 온통 녹색의 그리움과 한가로움이 곁
에 앉습니다. 자동차의 소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무어라고 외치는
듯한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습니다. 익숙하게 손이 가
던 전화의 막무가내인 부름도 언제적 일인가 기억조차 가물합니
다. 창 밖으로 보이는 수양버들의 늘어진 가지 위로 쫑긋 거리는
토끼의 귀 같은 작은 잎들이 기다림의 끝에 두 눈을 두리번 거리
고는 떼를 지어 우와아~ 솟아 나고 있습니다. 천천히 춤을 추듯
일렁이는 모습이 우아하기 까지 하니 사람을 반하게 하는 매력은
사람에게만 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무슨 소리인가 궁
금해져서 듣고 있던 Fourplay 의 Eastbound 소리를 조금 낮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귓가를 떠돌던 그리움의 향기에서 조금 벗어
나 보았습니다. 하아~ 그렇군요. 개울물 소리 입니다. 밑바닥 모
래사이로 송사리가 유유히 떠도는 개울입니다. 저는 정말로 마음
보다도 먼 곳에 와 있나 봅니다.

언제나 고독을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고독이 두려워서 겨울날
저녁이면 미련이 넘치는 정다운 전화를 하고 늘 가던 포장마차에
서 또한 그늘진 친구의 눈매를 발견 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
각합니다. 내가 처해 있는 비슷한 상황의 친구가 갑자기 나를 잊
을 정도로 잘되는 것도, 또 어느날 우리가 속한 모든 사회적인
번잡함에서 완전히 벗어나 소식조차 모르게 되는 것이나, 시골 어
디에선가 유령 같은 모습으로 떠돌더라 하는 안 듣느니 못한 소
식 또한 원치 않습니다. 함께 소주를 마시던 친구가, 누구에게나
나의 몇십년지기야라고 말하던 그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물질적
인 유혹에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의 얼굴로 내 눈동자를 바라 보
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몰락을 보았습
니다. 그리고 텁수룩한 그의 까칠해진 턱 밑을 보았습니다. 아니
그저 담담합니다. 나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게 되지 않기를 바랍
니다. 어리석기로 말하자면 그를 친구로 생각한 나는 뭐 별 다르
겠습니까? 우리는 마주치는 손바닥 이었겠지요.

어딘가에서 아직 덜 식은 열정과 꿈을 가지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 어디야? 나? 나는 아직도 너
와 같은 곳이야. 이 행성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부지런하게
걷고 있는 중이야. 나는 뜻 하지 않았건만 한번 오르면 내리기가
절대로 쉽지않은 지구 호에서 한참 멀미 중이고 고민 중이고 늘
슬픔과 희망의 끝 자락을 오르내리고 있어. 아니 오늘은 조금 달
랐네. 나는 다섯 그루의 굉장한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 꽃이 후드
득 거리는 곳에서 잠시 담배를 한대 태웠어. 정말 얼마만의 정차
인지 몰라. 아이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새가 지나가는 멋진
궤적도 바라보았지. 나는 조금 얼굴이 탄 사람들이 사는 새로운
행성에서 산마루를 걸었어. 정말 즐거운 얼굴들을 하고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어. 그런 웃음을 보았던 것이 언제인지 몰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웃음을 흉내 내고 있었어. 아마 조금 일그러져
있었을 지도 몰라, 잘 알잖아… 나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잘 웃
지 못했던 것… 그래 나도 몰라 내가 왜 그리 웃지 못하게 되었
었는지…어쩌다 그렇게 되었어…

술시가 되었으므로 모닥불 가에서 이글거리는 불가에서 흔들리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붉게 물든 얼굴들이 많이 정답게 느껴집니
다. 양념으로 치장한 오징어가 뒤척이는 저녁 전원의 Blue는 도
시에서 느껴지면 어깨를 짓누르는 Dark가 아니라 light blue입니
다. 소주 한잔을 단숨에 넘기며 북두칠성을 보았습니다. 두 잔을
마시고 북극성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알았고, 나는 폭풍
우 속을 간신히 벗어난 예전의 뱃사람들이 그랬듯이 북극성을 보
며 나의 위치를 가늠하고 긴 숨을 들이 쉬며 안도를 하였습니다.
석 잔을 마실 때 까지도 나는 오라이온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하
늘의 한쪽을 가린 옅은 구름보다는 내 마음의 근심으로 인하여
혹은 가리워진 시야의 일부 때문은 아닌가 돌아 보았습니다. 별
자리 아래 모닥불은 아름답고 요염한 불꽃을 까만 밤하늘로 날름
거리며 유혹하였고, 나는 빈 술잔을 입술에서 떼지 못한 채 또
다른 행성을 떠다니며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뭐하세요 한잔 더
하시지요. 네 그러지요. 이 뜬금 없는 장소에서 예정 없이 만났지
만, 오늘 나는 ‘초면 이군요’ 라는 길손에게서 ‘그러시군요’ 라는
술잔을 받습니다. 웃으며 술잔을 넘긴 것은 길손이었고 두터운
목살 바비큐를 뒤집어 놓은 것은 길손을 길손으로 보고 있는 좀
더 외로운 길손이었습니다. 문득 이렇게 좋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친구를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허두를 떼며 떠올리는
그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Jazz가 또 다른 행성의 대
기에 우유와 꿀이 흐르게 하고 별이 질 때 까지만 장승으로 있기
로 한 나는 친구의 이 시간이 궁금합니다. 그렇다고 그를 위하여
따로 준비한 큰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가 꾸고 있는 꿈이 한발자욱이라도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
게 앞으로 나아 가게 되길 바랍니다. 돌아보며 친구도 찾고 때때
로 사는게 이런 건가 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나
름대로 고민하고 그게 그렇더라구 하고 이야기도 해주고 먼저 뭔
가를 발견한 우리들 중의 한 친구가,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해
바바. 아니 내가 힘껏 애써볼게…그렇게 비록 호언장담에 불과할
지라도 내 사랑하는 친구의 일이 순조로운 길 머리를 잡을 것을
바라고 바랍니다. 네 그래요. 예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기
대를 하였고 그것이 모래를 뭉쳐 보려는 Giant Project중의 하나라
는 것에 더 이상 꿈을 걸지는 않습니다. 작은 것, 사랑을 잉태한
어떤 것에만 조금 기대를 하기로 합니다.

늘 기대하지 못할 것에 찾아 다니며 헛된 기대를 하고, 어쩌면 그
렇게 절대적인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 하였는지를 돌아보면 나는
차라리 당신에 대한 그리움 마저도 사치라고 생각 합니다. 이 저녁
고운 별을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부러 듣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
이 저릿저릿하게 그립습니다. 그래서 하루 만큼의 부지런을 더하
였을 뿐입니다. 이 행성의 밤에 깨어 있는 누구이든 혹시 조금
바쁘더라도 지금 사랑 하세요. 목련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 때
사랑 하세요. 목련이 구슬픈 낙루를 마치더라도 오랫동안 조금도
움직임 없는 그런 사랑이 님의 곁에 짙은 향기로 머물기를...


도곡동에서 조금 먼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