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날짜..
수십년 동안 그날이 오면 남편은 한번도
거르지 않고 내게 자신의 한달 수고비를
가져다 주었었다.
어느땐 무심하게 ,
때로는 당연하게
때로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난 그 수고비를 받았다.
이제 그 날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남아있는 다른 날들처럼..
남편이 퇴직하던 날.
8개의 라면박스에 가득 가득 짐을 꾸려
현관으로 들어 서던 그 날.
난 비로소 남편이 실직을 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당신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많은 이야기로 위로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이 말 하나 던져 놓고 그만 목이 메었다.
처음엔 이곳저곳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이며
친구들이 식사한번 함께 하자며 전화통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또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그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한달이 지나고...
전화기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울림을
멈추었다..
남편은 그 막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자신이 타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잊혀져 간다는 그 사실에 밤마다 술로
시름을 잊으려했다.
조심스레 여행을 권유해 보았다.
그것이 무슨 탈출구라도 될 듯이.
한겨울에 떠나는 둘 만의 여행.
언제 겨울여행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고작 일년에 한번 여름에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휴가에 쫓기듯이 다녀오곤 하던 설악산.
남편은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간단한 짐을 꾸려 온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겨울여행..
참으로 할 것이 못되더라.
앙상한 나무가지마다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어대고
그 바람처럼 우리들 마음조차도 쓸쓸하기만
했다.
호기를 부려 잡은 호텔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함은
꼭 겨울 탓만은 아니리라.
서로가 상처받은 사람끼리 누가 누구를 위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그저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속내를
감추기에 급급햇다.
밤이면 둘이서 노래방을 갔다.
너 한곡 , 나 한곡..
둘이서 노래 부르다가
그만 어느 노래였던가 가사가 너무도
우리 처지와 같아서 그만 목이 메이고 말았다.
겨울이라 손님도 별로 없는 쓸쓸한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달랠적에.
예전 같으면 단 한번의 망서림도 없이 주문했을
메뉴를 이런 저런 궁한 이유를 들먹이며
피하려 할 때..
실직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절실히 와 닿는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축복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아..
환상적인 눈꽃 축제라니..
마치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는 듯이 아름다워서
쓸쓸했던 여행이 위로가 되었었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이른 새벽 시계의 알람소리에 화들짝 잠이 깨서
아침밥을 준비하던 그 시간에
난 침대에서 뒹굴면서 게으름에 빠져 들었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낸 후..
둘이서 늦은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청소를
하다보면 시간은 벌써 점심때가 훌쩍 지나고.
점심시간이면 한정식을 먹을까,
일식을 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던 남편은 이제
국수나 수제비에 더 익숙하다.
수십년간 함께 있음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그가 하는 작은 관심..
아니 잔소리가 그대로 화살이 되어 꽂혀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점점 예민해져 가는 나날들.
처음엔 그를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오랜 동안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수고한 그 보람을 돌려 주려고..
하지만 함께 있음은 그가 없던 날들에
내가 누렸던 자유를 박탈 당함이었으니
난 점점 고개드는 나의 이기심에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소한 일로 부딪히고..
소리지르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함을 못내 서운해 했다.
한달을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나니
서로가 기진맥진하여
휴전을 선언하고 말았다.
우리 평화롭게 살자---
당신은 날 인정하고..
난 당신을 인정하고..
남편과 나는 산에 오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아직 한번도 평일에 산을 오른 적이 없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실직을 인정하기 싫단다.
사람이 한적한 평일에 산을 찾는 다는 것이
아직 용기가 없단다.
어쩌다 은행에 볼 일이 있어도 남편은 절대로
혼자서는 못 간단다.
몇십년을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해왔던 그 일이
번거롭고 싫기도 하지만
낮시간에 그런 곳에 어슬렁거리는 것 자체가
싫단다.
그래서 은행에도 꼭 함께 가기를 원한다.
한동안은 새로운 일을 찾겠다고 의욕을 불태우기도
하더니 이젠 그것조차도 승산이 없는지
포기 하겠단다.
낮시간엔 거실에서 TY를 보거나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고,
때로는 혼자 산책을 나간다.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흘러간다.
돈은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빠르게
빠져 나간다.
어느 날인가..
은행에 갔다가 텅 비어 버린 잔고를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몫돈을 찾아서 통장을 채우고 나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가 재직하는 동안 누려왔던 행복한 날들이
꿈인 듯이 아련하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거울을 보지만
거울 속엔 지치고 늙어가는 한 여인의
얼굴만이 창백하게 서 있다.
나도 이제 현실을 내것이라 받아들여야 마땅한데
아직도 내마음 속엔 부질없는 희망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실직 5개월째..
그와 함께 하는 일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점심을 함께 먹고.
저녁엔 함께 나가서 맥주도 한잔하고.
때로는 야외로 드라이브도 하고 온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하지만 아직 우린 서투르다.
실직을 인정한다는 그 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