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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71


BY 녹차향기 2001-04-06

나무를 심는 식목일이라지만,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식목행사에 참여를 했을까...싶으니깐 조금 씁쓸한 마음도 들고, 또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도 들고, 아무튼 저는 집에서 편안하게 뒹굴며 지낸 하루였거든요.

아침햇살이 화창하길래 모처럼 김밥을 쌌어요.
입맛도 없고, 이것저것 반찬만들기도 귀찮아질 때, 저는 가끔 김밥을 싸요.
어떤 분들은 그렇게 귀찮은 거 어떻게 아이들 소풍도 아닌데 싸느냐고 하지만, 김밥만들기가 사실 젤 편한 거 같던데....
잠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은 썰지도 않은 김밥을 통째로 들어서 우적우적 두 줄이나 거푸 먹더니 흐믓한 웃음을 지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컴퓨터 게임하다가, 왔다갔다 하며 맛있게 먹어주었지요.

어제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한의원엘 갔었어요.
회사다니는 동생은 조금 늦게 출근하겠다고 회사에 연락을 해 놓고 엄마를 모시고 나왔더군요.
유명한 한의사인지라 미리 예약을 해놓지 않으면 진료를 못 받기 때문에 진작에 예약을 해놓았었는데도 환자들이 많아서 무려 1시간2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엄마 차례가 되었어요.

눈을 지긋이 감고 엄마의 양쪽 손목을 차례로 진맥을 해 본 한의사 입에서 첫번째로 떨어진 말이
"지금 안 아프신 곳이 없으시죠?"
였답니다.
"특히, 관절이 굉장히 아프세요. 허리, 무릎, 어깨... 그 중 어디가 제일 좋지 않으세요?"
"예....허리를 몇 년전에 다친 적이 있는데, 허리가 제일 아프고 그 다음 어깨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아프네요."

엄마의 얼굴 표정은 꼭 밖에서 맞고 집에 돌아왔을 때,
'너 누가 이렇게 했어? 어떤 놈이야? 걸리기만 해 봐!!'
하며 자신의 상처를 호호~~하고 불어주며 얼러줄 때의 아이표정처럼
이제껏 무심하게 내버려 두었던 엄마의 육체적 고통을 이제서야 인정받았다는 하소연이 가득한 얼굴이었어요.
아!!!
엄마도 아팠구나!
엄마도 아플 수 있는 사람이구나!

어쩌다 친정에 가도, 모처럼 걸음한 딸래미에게 뭐 하나라도 더 입맛에 맞는 것을 해먹여서 보내시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시며 이것저것 음식을 하시고, 든든한 사위보고 그저 고맙다고, 내 딸이랑 알콩달콩 잘 살으라고 고기 구워주시고, 먹는 밥그릇에 맛있는 반찬 하나 더 얹어 주시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어요.
감기다, 몸살이다, 허리아프다 하시면서도 애써 불편함을 감추시던 엄마의 모습.......
엄마는 맨날 저렇게 여기저기가 흔히 아프시려니, 아이 다섯 낳아 기르시며 몸조리를 제대로 하기를 하셨을까, 보약을 드시기를 하셨을까, 당신을 위해 변변한 사치를 부리기를 하셨을까....
그저 엄마는 스스로 그런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려니 했었던 내 자신이 한심해서 고개를 숙였지요.

"어머님을 많이 도와드리세요. 지금 살림하고 움직이실 정도가 아니예요. 온 몸이 방망이로 맞으시는 것 같죠?"
아예 엄마의 얼굴 표정이 울 듯 하셨어요.
그렇게 많이 편찮으셨구나....
밤에 주무시면서 끙끙 소리를 내신다고 아버지가 걱정어린 음성으로 전화를 하셨을 때, 그때부터 진작에 약을 잡수셨더라면...

함께 얘기를 듣고 있던 동생의 안색도 좋질않았어요.
다섯명의 자식중 유일하게 남아 부모님 곁을 지키며 평소에도 부모님 생각을 끔찍하게 하고 있는 여동생은 잠시 천장을 쳐다보더군요.
꾸준히 약을 복용하시면 50%정도만 나으실 수 있다고, 그 이상 낫는다고는 장담을 못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물러나왔지요.

나이가 들면 허망하리만치 볏단처럼 가벼워지는 체력,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지는 곳도 많고,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맛있는 음식도 조심스럽게 먹어질 때, 여행을 나서는 것에 점차 자신감이 줄어들 때, 자식들에게 구차한 짐이 될까 걱정스러울 때.....
엄마는 보약을 많이 먹으면, 나중에 눈 감을 때 힘들다고, 죽을 때 얼른 죽지 못한다고 보약 잡수시기도 싫어하셨어요.

어제도 딸들의 성화에 못이겨 억지로 떠밀려 나오신 걸음이었고요.
택배로 한약을 받기로 하고 동생은 엄마가 좋아하시는 스테이크를 사드린다고 조선호텔 지하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지요.
서양음식이 입맛에 더 맞는다는 엄마는 정말 맛있게 양식을 드셨어요.
이름도 외기 힘든 무엇무엇을 곁드린 야채샐러드와, 어떻게어떻게 구운 갈비살과 치즈와 빵을 넣은 요상한 스프와 파인애플,바나나,야자열매를 갈아 만든 쥬스를 정말 배부르게 먹었어요.

동생은 회사로, 엄마는 친정집으로, 저는 집으로 각자 갈 길로 헤어졌어요.
제 손에는 엄마가 한가득 음식을 넣어주신 스치로폴 박스가 들려있었고요.
집에 와 열어보니 오이소백이,열무김치,반건조오징어,쑥떡,호박떡이 얌전히 들어있었구요.
그렇게 아픈 사람이 무엇한다고 이렇게 갖가지 맛있는 반찬을 했냐구요?
엄마가 그렇게 편찮으시도록 내버려둔 자식들이 뭐가 좋다고....

약 꼬박꼬박 잘 드시고, 하루라도 빨리 좋아지셔음 좋겠어요.
그래야 50%정도만 낫는다고 했지만.
엄마, 정말 죄송해요.
더 건강하시고, 여행도 더 많이 다니시고, 좋은 것 더 많이 드세요.

글구, 혜영아, 정말 고마웠어.
너없었으면 부모님이 얼마나 허전하셨겠니?
오랜만에 고급스런 음식, 속이 느끼하도록 먹여줘서 고맙구.
아줌마들은 그런 레스토랑 들어가려면 무지 고민해야 하는데, 니 덕분에 포식했다. 잘 먹었어. 동생한테 얻어먹는 것두 괜찮은데?
다른 아줌마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거 보이지?

밤이 꽤 깊어가네요.
낼은 아이들 교통지도하러 아침일찍 횡단보도에 깃발들러 나가야 하니까 이쯤에서 하루를 접어야겠어요.
모두들 평안한 밤 되시길 바라며.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