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개나리는 그 노오란 꽃잎으로 화사한 단장을하고
잎새보다 먼저 봄마중을 나온다.
노란 개나리..
난 노란 색이 싫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어려웠던 시절.
어머닌 날마다 노란 좁쌀을 섞어서 밥을 지으셨다.
아니 좁쌀에다 쌀을 조금 넣었다는 표현이 아마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보이는 하얀 밥알은 마치 무슨 보석처럼
꼭꼭 숨어서 젓가락으로 한참을 헤집어야 그 희고
고운 모습을 내보이곤 했으니..
어느 봄날에.
시나브로 개나리가 피어 나던 그 시절에
아마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되었을 때였지 싶다.
4교시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기다린던 점심시간.
난 그 노오란 조밥이 너무 창피스럽고 싫어서
양은 도시락 뚜껑을 조금 열고 한 수저 떠 먹고
다시 뚜껑을 닫고 하면서 까끌까끌한 조밥덩이를
쪼글쪼글무친 무말랭이와 함께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반 담임이셨던 김정희 선생님.
난 아직도 그 선생님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30대 중반정도 되지 않았을까..
괄괄하시고 화끈하신 그 선생님이 교실을 돌면서
분단별로 도시락 검사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땐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서 혼식 장려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정부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하셨던 것이리라..
형편이 좋아서 하얀 쌀밥만으로 도시락을 준비한
아이들은 살금거리며 옆짝이며 뒷짝에게 잡곡밥을
구걸(?)하여 눈가림을 하기도 했었다.
난 사형수가 된 듯한 심정으로 간을 조리며 내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분단으로 걸어 오시던 선생님.
손으로 가리며 훔쳐온 밥 몰래 먹듯이 하는
날 보시고 다짜고짜로 도시락 뚜껑을 확--
열어 제끼셨다.
그때의 그 무안하고 처참함이란...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난 업드려
소리없이 울었는데..
그 선생님 오히려 날 야단치시며 손바닥 세대를
때리시며 뭐가 그리 부끄러우냐고 호통을 치셨다.
난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선생님 몰래 남은 밥을
쓰레기통에 다 부어 버리고 수업이 끝나도록
눈이 떡방텡이가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서럽게 서럽게..
그리곤.
집에 돌아와서 공연히 엄마에게 울고 짜고 난리를 치면서
내일부턴 도시락 절대로 안싸간다고 협박까지 하고.
난 정말 철없는 아이였다.
그 다음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어 본 순간..
난 잠시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어제와는 정 반대로 하안 쌀밥에 노오란 별처럼 숨어있던
좁쌀들..
그리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계란 후라이까지..
아......
얼마만에 먹어보는 쌀밥이던가.
난 여봐란 듯이 도시락 뚜껑을 활짝 열어 젖히고
밥을 퍼넣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쌀밥이 삼키기도 아까울 정도로 입안에서
달디달게 씹히는게 정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기적인 딸네미 하나 때문에 다른 식구들이
색상도 선명한 순 100% 조밥을 목이 메이게 삼켜야 했을 터이니
그저 부모님께 업드려 백배 사죄하고 싶을 뿐이다.
조밥에 얽힌 추억 또 하나--
어느날 아침에 부엌에서 밥을 지으시던 어머니의
비명 소리에 새벽잠을 깨었다.
깜짝 놀래서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연탄 아궁이에
거꾸로 쳐박혀 버린 밥솥단지가 보이고.
아마 행주로 뜨거운걸 드시다가 그만 실수로 놓쳐버리신
것이리라..
뒤집혀진 솥을 들어내니 활활타는 빠알간 연탄불 위로
노란 조밥이 시커먼 연탄재를 뒤집어 쓴체 뜨겁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어머니의 난감해 하시던 그 표정이라니.
그날 온 식구가 그 재로 뒤법벅이 된 조밥을 노란 콩나물국에
말아서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렸하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날이 바로 울 엄니의 생일날 이었다는 것을..
거리엔 노오란 개나리 천국이다.
아파트 담장에도 산 기슭에도 화단에도.
피하면 피할 수록 더욱 더 진하게 다가오는 노란 개나리..
난 그래서 노란 색이 정말 싫다.
지겹던 가난의 색깔 노란색---
노란 단무지.. 노란 무말랭이. 노란 조밥,
시름시름 앓으시다 노랗게 변해 가던 할머니의 얼굴도..
노오란 개나리가 별처럼 피어나는 봄날에
난 어디로 눈길을 주어야 할지.
앞 산에 가서 진홍빛 진달래 사랑에나 흠뻑 빠져 볼까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