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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여쭈어 볼까요?


BY 남상순 2000-05-23

누구에게 여쭈어 볼까요?누구에게 여쭈어 볼까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금의 계모가 시집을 오셨다. 팟쥐엄마를 곧장 연상시키는 '계모'라는 단어가 얼마나 거리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후덕하신 그 분은 결손가정을 일으킨 위대한 여인이다.

처녀 때 사회사업의 꿈을 가졌던 양반가의 귀동 딸이였다. 지금은 문틈의 렌즈로 사람을 확인하고야 대문을 열어주는 세상이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은 삐꺽~ 대문소리만 나면 보따리 장사들이 들어오는 동네였다. 별별 장사가 다 드나든다

계모는 딱한 장사는 필요없는 물건이라도 억지로 사서 머릿짐을 가볍게 해 주는 여인이었다. 동네에선 '효부'라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장사들이 소문까지 싣고 다녔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그리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11년간 시어머니 중풍수발을 얼굴 달리함이 없이 해오신건 사실이지만, 넙적다리 살을 베어 삶아 드리거나, 새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드린 적이 없으므로 왜 효부인지, 나는 참 이상 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효부의 수준은 그런 수준이었다.

훗날 혼자 생각인데 나의 계모에겐 한가지 남다른 점이 있었다.

부엌에서 씀바귀나물 한가지를 무치더라도 그릇 채 안방까지 들고 들어와서는 "어머니 간이 맞나요? 씀배가 좀 억센가요?" 하면서 당신의 시어머님께 여쭈어 보는 것이다.

나는 투정섞인투로 계모에게 물었다. "엄마! 여태 그것두 못해요? 할머니한테 여쭈어 보게?" 어머니는 나를 건너방으로 조용히 불렀다.

"게 앉거라! 두가지 점에서 할머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유익하단다. 첫째는, 할머니의 경험을 단 한 순간에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고, 둘째는. 할머니는 엄마가 무언가 여쭈어 볼 때 아주 행복해 하신단다" 이런 말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엔 무슨 말인지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계모의 얼굴이 심각하기에 난 일보 후퇴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평생, 건너 방에서 듣던 나즉한 계모의 말씀이 왜 이렇게 크게 내 귓전에 살아 있는 것일까?

대학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처럼 집에 돌아가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들을 너스레를 떨며 지껄일 때마다 계모는 할머니께 나물 무치던 때 여쭈어 보던 표정으로 신기하게 내 이야기를 들 어주곤 하셨다.

조부모와 살면서 주말에만 아버지에게 다녀오던 때가 잠시 있었다. 계모 몰래 아버지와 단독으로 만나 돈을 요청했다.

아버지는 "오! 그래! 주고말고! 엄마에게 맡겨 놓을테니 받아 가도록 해라" 야속하기 짝이 없던 아버지였다. 계모 몰래 몇푼 줄 수도 있을 법한데...'꼭 잡혔군! 새 여자에게 꼼짝도 못하는 아버지!'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던가?

하지만 가정질서와 대화의 채널을 분명히 해두셨던 아버지! 딸의 어떤 오해도 무릅쓰고 한결같이 아버지의 의지를 지켜 오셨다.

8선녀 집안의 맏딸인 나는 그러니까 외톨이 전실자식인 셈이다. 중대사가 생길 때마다. 이복동생들은 꼭 우리내외에게 최종 문의를 해온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큰 언니하고 상의했니?" 계모는 꼭 확인을 하셨다고 한다. 집안 대소사에 내가 모르고 지나는 일은 없다. 계모는 나를 섭섭하게 하신 일이 없다.

지금도 난 내 아들에게 말한다. "누나 의견은 어떠하냐?'

아들이 대답한다. "이건 엄마! 제 일이예요" "그래, 그래도 누나하고 이야기 나누렴!"

내 나이 쉰쯤되니 마땅히 여쭈어 볼 곳이 없어 힘겨울 때가 많다 별이 자꾸만 떨어진다. 밤도 깊어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