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투숙하시려고요?"
"예."
이미 산에서 내려 올 때, 땅거미가 긴 그림자를 지었다.
이른봄이라서 그런지 오후 7시경 즘이었던가....
산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석정 온천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고 마음의 짐을 풀었다.
입은 옷 위에 바바리 하나 걸치고 손가방하나 들고 나왔으니
풀어야 할 여장도 없었던 것이다.
곧 온천 수에 하루의 지친 육신을 담갔고,
열 받아 달아올랐던 마음의 피로도 따근한 온천 수에서 녹았다.
밤 10시 까지 한다는 온천 목욕탕은 벌 써 손님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몇몇만 있었는데 아마 나처럼 투숙객인 것 같았다.
객실에 일찍 올라 가 봐야 잠만 자면 될 텐데 ..싶어서
마칠 때가지 온천 수에 오래 동안 머물었다..
오늘 하루의 일기를 머리 속에서 쓰고 있으니 자꾸만 눈물이 나오네.....
아무 계획 없었던 여행!
솔직히 말해서 누구와의 약속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면
어판장의 새벽 일, 가게 일 땜에 몇 번이나 생각하고 그리고 주저앉고..
그래 마저, 맞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휴가이다.
나라고 천날 만날 일만 하다가 죽으란 법 없지...
이젠 나도 쉴 수 있는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온천 수 뿌연 김 살 연기 속에
내 지난 과거인 삼오 때 산소에서 일어났던 그 분노가 지금 피어오르고 있다니....
병들어 죽은 사람의 원인이 꼭 아내의 잘 못인 양,
시동생과 시댁은 마녀 몰이 하듯 나에게 몰아 부쳤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자기 아버지 시신을 묻고 돌아온 흙 자욱이
고무신에 씻겨지지 않았던 그 날.
삼촌이란 사람이 삼사 해상 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얼마 후 딸아이가 신고 갔던 신발은 어디에다 벗어 던지는지
맨 발로 씩씩거리고 분을 참지 못하고 들어오더니.
"작은 엄마요, 이럴 수 가 있어요.
삼촌이 아버지 죽은 조카들에게 위로는 하지 못하더라도
울 엄마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나쁘게 공격할 수 가 있답니까?
어찌하여 아버지의 죽음이 엄마의 잘 못 이지요?
울 엄마도 아빠 땜에 죽도록 고생한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뭐?
아버지 죽음이 잘 못 거둔 엄마의 잘 못 이라고
자식들에게 엄마하고 혈연의 정을 끊어라고요..."
그리고 마루바닥을 치면서 엉 엉 소리내어 지 아버지 죽은 한을 내 품었다.
초상을 치룬 바로 그 날이라 그 사람 친구 분들과 시집식구들,
그리고 친정식구들이 가득히 모여서 나의 서러움을 다둑거러 주고 있는 참이었다.
예고에도 없었던 검은 그림자가 우리 가족에게 더리어 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동생이 평상시에 우리 부부에게 금전 관계로 속을 많이 석혔다.
우리부부에게 돈을 가지고 갈때는 빌러간다고 했고
그 후에 갚으라고 하면 언제나 못 마땅하였고....
그 당시에도 꺼그러운 감정에 있었다.
할 말은 아니지만 시동생은 언제나 형들이 자기에게
한 없이 도와주기를 원했지 않았던가.
채무관계는 당연히 형님이기에 갚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죽은 형과 많은 말 다툼이 늘 상 있었다
그러니 별로 달갑지도 않았던 친정 식구들 앞에서
형수가 자기네 호적에 남아 있지 못할 것 같으니
일찌감치 파서 나가라는 것이다.
그 날은 그 사람 산에 묻고 온 날이라 아무 말하지 못했다.
친정 언니가 삼오 날까지 집안 시끄럽게 해서 안된다고
원통해서 울부짖는 자기 동생을 자제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친정 식구들이 이런 일도 있느냐고 한 바탕 소동이 났다.
그리고 삼일 후 삼오 날.
그 사람에게 시집의 사촌까지 많은 가족들과 친정의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그사람 묻힌 산으로 왔었다.
아마 나와 내 자식을 제외한 그 모던 사람들이 이 사람과의 마지막 만남이 이리라..
산에서 내려와서 편편한 잔디 위에 자리를 깔고 준비해간 늦은 점심을 차렸다.
그런데, 그런데 시댁의 시어머니, 형님, 시동생 등이 먹히지 않는다고
식사에 손도 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너무나 불쾌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특히 형님은(그 당시 시숙님은 회사 일 관계로 삼오 때도 산에 오지 못했다)
초상 당해서 있는 동안 내내 식사를 밖에 식당에서 해결한다고 들었다.
그래 암으로 죽은 집구석엔 암이란 병균이 득실거리고 있으니깐...(그 당시 나의 생각이였다)
"형님. 고맙습니다. 수고 많았어여.
이렇게 우리부부가 묻힐 죽음의 집도 사 주시고....
내가 좀 정신 차려서 아주버니한테 인사도 드리고 큰댁에 곧 갈 겁니다"
"아니, 이제 모던 것이 끝났는데 자네가 우리 집에 올 필요가 있나?
됐네. 오지 말게. 자네 뜻 잘 알고 있네"
" 예? 뭐라고 했어요? 형님.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이소."
그리고 나의 미친 발악이 그 큰 산 골짜기 전체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제 것 시집에서 나에게 불평으로 응어리 저서 몰아 부쳤던 것을
더는 참지 못하고 한이 되어 피눈물로 토했던 것이다.
"맞심더.
암으로 죽은 가족과 인연 끊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더 이상 연연 안 할겁니다.
내가 모르는 줄 압니까?
잘 사는 큰집에 우리 가족이 빈대 붙을까 봐 겁나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염려 꽉 붙잡아 매어 노이소.
내 비록 오늘을 살다가 내일 마른 땅에 머리를 박고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네들 한테 구걸하지 않고 아이들 공부시킬 겁니다"
아마 그 사람 큰 형님에게 유언으로 남긴 아이들 교육 문제로
심각한 토론이 시댁에서 벌어짐을 뒤늦게 들어서 알았다.
사촌시동생들이 기절한 형수인 나를 허겁지겁 찬물을 퍼부어서 깨웠다.
큰집 형님은 그 자리에서 그 것이 아니라고 사과하고
동서인 나에게 잘 못을 빌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앞길이 힘들고 평탄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우리 가족들과 친정식구들만 함께 산으로 내려왔다.
이제 무엇을 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먹고살아야 한담!
오랜 병고 끝에 이 것 저 것 정리하고 나니 시골집 한 채와
수협어대금 정리하고, 주고받을 것 계산하니
한 5백 만원 정도의 빚이 우리가족에게 남았다.
우리부부가 부모님에게 땡전 한푼 유산 물러 받지 않았지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 대구에 내 보내서 공부시키면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헌데 집안에 우환 3년이면 고래등 기와집 지붕이 날아간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2년 넘게 끌어 온 그 사람 병 수발에
도시의 어지간한 아파트 한채값이 날아가버렸다.
나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재산 공개를 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믿지 마라.
더욱이 절대 큰집에 가서 손 벌이지 마라.
거지가 되어 깡통을 차더라도 큰 집 황금으로 보조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과의 그 약속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자부 할 수 있다.
단 아이들이 큰댁의 여러채 있는 집중에
삼덕동에 있는 집을 전세로 얻어 있다가 ?겨 나올 때 외엔....
다음 5편엔 아이들 데리고 살기 위한
한 여인의 삶에 대한 투쟁 얘기를 할 겁니다.
언제나 님들과 같이 함에 감사 드립니다.
라일락 새벽 일 나갑니다.
오늘은 얼마의 황금을 모아 올까요...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