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276

괘종시계


BY 염원정 2002-02-26

--괘종시계--
                               염원정
 

방학을 맞은 작은아이와 함께 청기와 기억 자로 멋지게 꺾인 성환 시골집 작은할아버지 집을 찾았다 동그란 쇠고리가 달린 태극 무늬 나무대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백수를 바라보는 작은할머니가 제일 먼저 방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누구슈?
몇 해 전부터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하신다는 작은할머니. 같이 사는 식구도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나 생판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한다는데, 몇 년만에 찾아간 나를 몰라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원정이예요.
어, 언청이여? 저런, 어쩌다 언청이가 됐누! 고운데 안됐구먼.......
가는귀먹은 작은할머니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언청이 되 버린 나는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가 실없이 튀어나오는 웃음을 가리며 곁에 있는 서 있던 아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할머니 얘는 제 아들 영상이예요.
면상이라구?
엄마가 언청이가 된 마당에 자기는 뭐가 될지 불안했는지 내심 조용히 곁에 서있던 작은 얘가 할머니의 엉뚱한 되물음에 불쑥 나보다 앞서 또박또박 제 이름을 건넨다
면이 아니고요 영, 이요 영, 영상이예요!
영... 멍청이여?
!!!!!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마음속에 서글픈 기가 차는데,
눈물샘만 할머니 말대로 -영 멍청이-처럼 뚫려선 찔끔찔끔 눈물을 지렸다.
나는 할머니의 앙상한 팔이며 다리 어깨를 주무르며 할머니가 알아들으시건 못알아들으시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잠든 할머니 얼굴에 난 두툼한 주름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반성을 한다
연로하신 할머니는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늘 무언가를 하나씩 잃어버리며, 무게를 줄이려고 소중한 정 하나 하나씩 가볍게 만드시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구에게든 늘 내 안부를 물어주시고 걱정해주시던 할머니. 손닿지 않는 곳에 사는 정..벌써 접어야 됐었겠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가니 왜 그리도 슬퍼지는지... 그래도, 그래도 할머니, 제가 자주 찾아 뵙지 못했지만, 그래서 원정이가 언청이가 되 버렸지만, 그래도 할머니 전 할머니 기억에서 언청이일망정 지워지고 싶지 않아요. ...............
---그렁그렁 눈물 고인 눈으로 어찌어찌 잠이 들었던지 눈뜨니 아침이다.
따그락 따그락.....
희뿌연 새벽빛에 까만 어둠이 지워지고 있지만, 낮선 잠자리에서 막 잠깬 눈으론 방의 윤곽 뿐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이 뒤섞여 있는 듯 방문은 어데 달려 있는지 천장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지 방바닥은 내 등에 붙어 있기는 한 건지... 갈피를 못 잡고 누워 있는데 규칙적으로 기름기라곤 없는 쇠와 쇠끼리 힘겹게 감기는 소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 괘종시계!
나는 번개처럼 머리 속을 스치는 한 골동품을 떠올리며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깔깔한 입 속에 갇혔다.
참,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온 심혈을 기울이며 열심히 시계태엽을 감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경건한 의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괘종시계.
그것을 작은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셨는지 아니면 작은집에 더 오래 전부터 있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릴 적 할머니의 기억을 들추면 언제나 괘종시계가 있었다.
오래 전에 소리내는 것도 흔들리는 것도 잊어버린 크고 묵직한 금부랄을 아름다운 기억처럼 매달고 오랜 세월 숨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할머니 덕분이었다.
나 어릴 적에도 하루 5분씩이나 지각이었는데, 할머니는 그 지각생을 한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시계 밥을 늦게 준 탓은 아닐까, 너무 많이 준 탓은 아닐까...하며 늘 당신 탓을 하며 애지중지하셨는데, 아침에 맑은 정신이 드는 할머니와 처음엔 시간에 맞게 잘 가다가도 해가질수록 점점 흐려지는 할머니 정신처럼 껌뻑, 껌뻑 간혹 제자리걸음 반복하는 시계바늘...
할머니의 손길에 닦여져 지금도 그때나 변함없이 벽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먼지하나 묻히지 않고 있는 괘종시계
할머니가 괘종시계를 닮아 가는 것인지 괘종시계가 할머니를 닮아 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할머니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매일 아침 눈뜨면 시계 태엽 감으시는 일을 잊지 않으시고 시계는 할머니가 감아놓은 하루치 심장을 지고 할머니 대신 숨소리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할머니와 괘종시계는 아무도 모르게 서로 대화를 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깼냐?
작은할머니는 시계태엽을 다 감고 나더니 자크대신 물려 놓았던 속바지 주머니 옷 핀을 풀고 큰 보물을 지니듯 시계 태엽을 감았던 나사를 집어넣으시더니 다시 핀으로 꿰매듯 채워놓고 돌아서다가 일어나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시곤 틀니도 안 낀 푹 꺼진 얼굴에 온통 굵고 힘있는 주름을 만들며 환하게 물으신다.
예? 아, 예... 할머니.
그래. 네 에비도 별일 없지?
예? 예. 그럼요.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또 까먹으셨나보다.
그래, 그랬다. 할머니는 소중한 것은 무엇이든 다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는 연습 그것이 치매이든 뭐든 간에 할머니 식의 비우기 연습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비워진, 지워진 아버지를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내고 있다.
할머니의 기억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아버지는
참 행복하신 분이다.
네 에비도 잘 있지?
할머니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안부를 내게 물으며 주름 가득 아버지를 퍼올리셨다.
괘종시게 태엽이 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