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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순이네 집


BY 통통감자 2000-10-26


벌써 10년도 지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쌀순이네 집에서 한 솥밥을 먹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입니다.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집을 찾던 저는 여학생들만 있는다는 깨끗한 단층 한옥을 소개받았습니다.


이름하여 쌀순이네 집.

아주머니는 손주를 여럿보신 할머니셨고, 생계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다 여운 딸들이 그리워서 일부러 여학생만 하숙을 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들 그집을 쌀순이네 집이라 불렀습니다.


유난히 개를 좋아하시는 아저씨 때문에 그 댁에는 진돗개가 한 마리, 잡종견이 두 마리, 그리고 쌀순이 이렇게 네 마리나 되는 개가 있었습니다.

쌀순이는 다리가 몽당하고 꼬리는 짧고 귀는 축늘어진 정말 볼품없는 개였지만, 아무도 쌀순이를 똥개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진돌이가(순종 진돗개) 아무나 따라나서려 하면 앞을 막고 짓어대며 진돌이를 지켰고, 두 마리 잡종개는 쌀순이의 그림자 조차 제대로 밟지 못했습니다.

순종이 의심스러운 진돌이는 너무도 얌전했고, 반의 반도 못되는 몸집의 쌀순이가 모든일을 처리했습니다.


여학생이 유독 많은 집이라 가끔 찾아오는 남학생을 내쫓는 일도 쌀순이 몫이고, 늦게 오는 밤길 마중나와 기다리는 것도 쌀순이의 몫이었습니다.

사람나이로 하면 환갑진갑 다 지났다는 쌀순이는 여전히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아저씨는 가끔 우리가 자는 방을 일일이 열어보고 혹여 나쁜 행동이라도 하지 않는가 지키셨고, 아주머니는 아침과 저녁밥만 챙겨주실 뿐 점심식사와 설거지는 우리에게 시키셨습니다.

여자는 자고로 지 밥거리는 챙겨먹을 줄 알아야 한다며 행여 뒷정리를 안해놓거나 귀찮아서 한끼라도 말없이 건너 뛰면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처음엔 내 돈들여 이 무슨 생고생이냐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네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하숙생이 아니라 친 딸을 대신하는 내자식이란 것을...



그 때 나이가 육십을 넘기셨으니 지금은 아마도 일흔이 훨씬 지나셨을 것입니다.

쌀순이도 아마 살아있기는 힘들겠지요.

그 분들이 갑자기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계시는지, 어느 딸이 모시고 계시는지,...


딸만 낳았어도 언제 한번 아들타령 안하셨다는 인자한 아저씨도 보고 싶습니다.

태연히 " ㅇㅇ아~ 이리와서 등좀 밀어라 " 하시던 엄마같고 할머니 같던 아줌마...

그리고 항상 우리의 보디가드 쌀순이...


스믈한살의 가을.

난 쌀순이네 집에서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