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이었다.
명절을 쇠러 시댁이 있는 부여에 가는 길 ...
일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는 남편만 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는데,
출발하자 마자 눈발이 날리며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어 시야는 온통 희뿌연 미로속이었다.
날씨탓이었는지 운전하는 내내 오른쪽 다리에 힘이 주어지며
뻣뻣한 긴장감으로 정신이 바짝 들었다.
평상시 침착한 성격 답지 않게 다소 긴장된 듯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변변치 못한 큰며느리가 채 오기도 전에 어머니께선 요모조모 알뜰히 장을 보아 놓으셨다.
요즘 세상에 못 먹고 사는 사람 그리 흔하지 않건만
부모 마음엔 돌아가는 길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셨는지...
시커멓고 못생긴 홍어를 자식 수대로 대여섯마리는 사셨나 보다.
꼬들꼬들하고 쫄깃한 맛이 일품인 어머니만의 노하우가 담긴 홍어회,
색스럽고 깔끔한 맛을 내는 홍어찜, 윤기가 반지르르 나는 LA갈비구이,
너무 달지도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시원한 식혜, 각종 나물꺼리, 과일박스 ...
어머니께선 모처럼 닥쳐온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채
아마도 며칠간을 장보는 일에 쓰신 듯 하다.
그렇게 보아두신 찬 꺼리를 하나 둘씩 꺼내 놓으시며
며느리 둘이서 오손도손 칼과 도마를 벗삼아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참 보기 좋으신 듯 시종일관 미소지으신 얼굴이셨다.
얘야... 이것 먹어봐라. 이것 참 맛나다...
무얼 그리도 많이 권하시는지,
며칠동안 계속 먹어대느라 나중엔 바지 지퍼가 힘겹게 올려졌다.
주위의 누군가는 휴일이 여러날이라고 콘도를 예약하여
스키장을 들려서 놀다가 시댁에 간다고 했다.
하지만 난 우리들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시는 부모님들 생각에
앞으로도 그리하지는 못할 것만 같다.
미처 흑설탕을 준비못했다고 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약식을 먹음직스럽게 찌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황설탕을 은은한 불에 녹여 케러멜을 만들어 들이고,
어떻게 만드는지 좀더 잘 보아두기로 한다.
떡국 한 그릇을 끓여 주셔도 어쩌면 그리도 온 정성을 다하여
보기 좋고, 맛깔스러운 깔끔함을 과시하시는지 ...
먹는 내내 기분좋고, 맛도 참 좋은 걸 보면서
마음이 담긴 음식은 얼마나 훌륭한 보약일까를 다시금 느껴 보았다.
일이 늦게 끝나서 설날 바로전날 늦은밤에야 집에온 큰 아들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시며 문밖을 서성이시던 그 모습에서...
난 부모의 마음이 저런것이구나 ...
부모에게 자식은 잘났건 못났건 모두 소중한 존재이구나 ...
그저 곁에서 잠시나마 바라다 볼수만 있어도 행복한 존재임을
너무도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것은 너무도 따스함이었고, 인자함 그 자체여서
세상을 살다가 힘이 들때면 비바람을 피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나무그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날오후 성묘를 마친 작은집 식구들이 죄다 둘째네인 시댁으로 오셔서
점심을 함께 들고 다들 돌아간 후에
동서네는 초이?날이 친정아버지 생신이라며 먼저 가야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다.
마음같아선 나도 그길로 친정 나들이에 나서고 싶었지만,
동시에 두 아들네 식구들이 다 가고 나면 갑자기 쓸쓸하실 것만 같기도 하고,
애비 늦게 와서 맛난것 못먹었다고 하시며 하루 더 묵어가라고 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
우린 다시금 눌러 앉았다.
저녁때부터 친정을 찾은 시누이네 식구들로 삽시간에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사는게 다 그런것이려니 잠시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조카들 오밀조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삐약삐약 아가에서부터 고3언니까지 조카들의 연령은 참 다양했다.
유난히 아기를 이뻐하는 울 큰딸래미는 내내 아기만 안고 이리저리
다녔다.
어쩜 그리도 아기를 잘 보는지 온통 칭찬의 말들이 넘쳐났다.
돌아오는 날에는 이른 아침을 먹고 깨끗이 뒷설거지를 마친 후
헤어지기 섭섭해 눈물을 보이고 마는 작은 딸래미를 애써 달래면서
다음번 만남은 아이의 입학식 무렵으로 정해둔다.
찬바람 마다하고, 아프신 허리 잊으신 채 그 많은 음식 준비 다 해주시는
아직은 어머니가 계신 집이어서 한없이 푸근하고 따뜻했다.
며느리들 고생한다고 애저녁에 새로 지으신 도시의 아파트 못지 않은 좋은 집에서,
며느리들 일하는 주방 바닥 차다고 보일러 쌩쌩 돌려주시던 시아버님의 사랑 듬뿍 받으며,
손에 꼭 쥐어주시는 세배돈 2만원이 든 봉투까지 고스란히 받았다.
그래도 못다 주시어 서운해 하시던 나머지 사랑까지 차곡 차곡히 쌓아서
트렁크 가득 바리 바리 실어 주시는 어머니의 현철하신 사랑을
나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건지 ...
나 그럴 자격이 있는건지 ...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마냥 서성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동안 아주 많은 빚을 그 분들께 지고 사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다시 일상속으로 돌아왔다.
며칠간의 연휴탓이었는지 하루종일 무척이나 바빴다.
퇴근하고,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몸살 안 나셨어요?"
"응 나는 괜찮다. 하루종일 누워서 쉬었는 걸 ...
넌 출근해서 일했으니 네가 훨씬 더 힘들었을 게야 ..."
그렇게 서로 염려해 주는 사이 이웃에 사는 시누이네서 뭘 한보따리 가져다 주고 간다.
촌돼지 고기 두 덩이, 노란 호박 오가리가 군데군데 든 찰떡 한덩이,
집에서 만든 두부, 청포묵 등등...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나눔의 정이 아닌가 싶다.
솔직히 몸은 좀 피곤하여 돌아온 며칠간의 일정이었지만,
얻은 것, 느낀 것이 더 많기에 내게 찾아든 잠시동안의 육체적 피로는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정말로 이제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금 잘 바라다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로 가족이 아닌가 한다.
넓은 의미의 가족의 범주에 드는 그들은
언제나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 ...
앞으로도 지금처럼 더이상 욕심내지 않고,
주어진 것에 고마워 하며 그렇게 살면 될꺼야 ..."
돌아오는 길목에서
난 그렇게 내 자신에게 나즈막한 속삭임을 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