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95

꼬마주부의 알.콩.달.콩//18. 신비의 비상금


BY 꼬마주부 2000-08-14

18. 비상금
비상금이란, 갑작스런 일을 당할 때를 대비하여 준비해 놓는 여유금.
그러나, 결혼한 자들은 남편들이 아내 몰래 꿍쳐 놓는 돈을 속칭, "비상금"이라고 한다.

"아유, 정말 남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교수님."
제가 잠깐 다니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있었던 일이예요.
"어제는 글세요, 남편 통장이 하나 발견?榮쨉? 참 나, 글세, 거기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아세요?"
40대 초반의 환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한 아줌마께서 속상하다는 듯이 얘기를 꺼냈어요.
"글세, 자그만치 백만원이예요. 백만원! 남자들 이래도 되는거예요?"
남편의 비상금 얘기였죠. 함께 수업을 듣던 회원들은 남의 집 살림에 웃음이 나서 키득키득 웃었고, 칠 순이 거진 다 되신
교수님도 껄껄 웃으셨어요.
"거, 그냥 모른체 넘어가 주시지. 남자들도 돈이 필요하다우."
"그냥 모른체 하는게 나을까요? 그래서 저도 아무말 않하고 짐짓 모른체 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더라구요. 아무리 생
각해봐도 그렇게 큰 돈이 모일만큼의 여유돈이 없었을 텐데, 어디서 돈이 났는지..저도 제 몫으로 따로 모아 둔 돈 같은건 없
는데 말이예요. 나중엔 배신감이 다 드는거 있죠!"
"얼마나 알뜰살뜰 모았겠수. 일이십만원도 아니고 백만원 씩이나 모았으니 대단한 살림꾼이 아니우? 그런 남편을 오히려 자
랑스러워 해봐요."
그 얘길 듣고 아직 초보 주부인 저는 딴 나라 남 일 같아서 그냥 재미있게 웃고 말았어요.
자랑 같겠지만, 우리 신랑은 잔머리라곤 도통 굴릴 줄 모르는 고지식의 황제라서 현재 주머니의 잔금까지 제 눈에 보이게끔
행동하고 다니는 그야말로 순딩이예요.
게다가 간신히 한달 버틸만큼의 박한 용돈을 지급해주고 있으니 제가 마음에 동정이 일어나서 몰래 지갑에 넣어주는 돈이
아니고서는 비상금이란 신랑에게도 저에게도 딴 집 이야기 일뿐이였죠.

그러던 여름의 기운이 밀려오던 2달 전쯤이예요.
직장을 옮긴 신랑은 초록색 통장을 하나 만들어 와선 자랑을 늘어지게 하더군요.
"우리 회사 1층에 은행이 있어. 그래서 통장 하나 만들었어. 봐. 내꺼야.으흐흐~"
결혼을 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그리 저에게 맡기면서 통장들도 해지를 했었다가 6개월만에 처음으로 신랑 이름으로 만
든 통장이예요. 저도 웬지 기뻐서 함박 웃음 소리를 냈어요.
"나랑 같은 은행거네?"
신랑이 씻을 때 저는 신랑 계좌번호를 옮겨 적어놨어요.
그리곤 신랑이 돈 떨어질 때쯤 될 때마다 1만원씩, 2만원씩 몰래 몰래 송금해줬죠.
함께 살면서도 얼굴 맞대지 않고 은근슬쩍 용돈을 쥐어주는 고 맛도 참 짜릿했어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났어요. 여름의 햇살이 하늘 꼭대기에서 무지막지하게 더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을 때였죠.
인터넷 뒤지는 것이 취미이자 유일한 낙인 저는 인터넷으로 통장 잔고도 확인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어요.
입금한 세금이 잘 빠져 나갔나, 살펴보고 하는 김에 신랑한테 1만원이나 보내볼까 해서 신랑 통장 잔고를 살펴봤죠.
며칠전 살펴 보니까 3만여원이 있더라구요.
자판을 뚜둥기고 화면에 뜬 잔액을 보았더니,...

27만원.

...............한참을 깜짝 놀랐어요. 한 달 용돈보다 많은...
다시 계좌번호를 찍고 비밀번호를 눌렀어요.
여전히, 27만원.

손, 발이 후들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장까지 떨리더군요.
신랑의 옛 연애편지를 발견했을 때만큼 눈 앞이 깜깜해지고, 문화센터에서의 그 아줌마 말씀대로 배신감까지 들었어요.

신랑이 퇴근했어요.
말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신랑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봤어요.
"어머님이 돈 줬어?"
신랑은 난데없이 뭔 말인가, 싶은 표정을 지으며 당연하게도 "아니. 왜?"그래요.
차마, "그럼 통장엔 웬 돈이야? 이 나쁜 사람아!"라곤 되묻지 못하고 "아냐."그랬죠.

며칠 뒤, 신랑은 내 슬리퍼를 사왔어요.
"다 떨어진 슬리퍼 뭐가 좋다고 여직 신고 다니냐?"
"봤어?"

그리고 또 며칠 뒤, 이번엔 제 민소매 티를 사왔어요.
"그 그지같은 파란 누더기 좀 그만 입어."
"엉."
하루하루 말 못하고 보내다 보니 심장이 뛰었던 통장사건을 잊어버리게 됐어요.
게다가 신랑이 뭐 사주니까 그저 좋아서 언제 의심했냐는 듯 마구 친한 척을 했죠.

그리고 보름 전, 여름 공기가 찜통인 듯 발악을 할 때 신랑에게 용돈을 주었죠.
용돈을 주고 나니까 다시 한 달 전의 통장사건이 떠 오르는거예요.
전, 신랑에게 오락CD를 사달라고 졸랐고 "니가 애냐? 이게 그렇게 재밌어? 씻고 가르쳐줄게."하고 욕실에 들어갔을 때
잽싸게 인터넷을 뚜드렸죠. 계좌번호, 비밀번호............47만원.
힉! 뭐야? 47만원? 여태 내게 사 준게 얼만데 47만원?
한 달동안 한 푼을 쓰지 않아도 40만원 밖에 안될텐데, 뭐? 47만원이라구?
이 나쁜 신랑에게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
신랑이 씻고 나왔어요.
"함! 이 번엔 딴 거 사줘. 아무거나 딴 거 사줘."
"또? 이젠 돈 없어."
"거짓말! 돈 많잖아! 빨리 사줘!"
"내가 돈이 어딨냐?"
"어디 있긴! 통장에 돈 많찮아! 빨리 사 줘!"
"통장?......너?....혹시, 뭐 조회하고 그러냐? 인터넷으로?"
신랑은 기분이 아주 나쁜 표정으로 되물었어요.
갑자기 내게 죄를 물으니 더 따질 수가 없더라구요.
"아냐, 뭘 조회해. 그런걸 내가 왜 해. 무슨 소리야. 그냥 해 본 소리야. 뭘."

.......어젠, 제부도에 다녀왔어요.
계획에 없던 곳을 다녀 오는 것이라 신랑에게 돈을 마구 쓰게 했죠.
그리고 다시 인터넷을 두드렸어요.
저한테 오락CD도 사줬고, 제부도에서 돈도 많이 썼으니 이 번엔 아무리 많이 남아도 30만원 대일거예요.

쓰륵쓰륵, 화면이 바뀌고,...
49만원.

쿵! 이제는 49만원이래요. 참, 나. 이제는 기가 막혀서 놀라지도 않아요. 저한테 돈을 훔치는 것도 아니라면......아무리 그
런가 보다 해도 머리속에 또렷또렷 떠 오르네요. 그러면서도 신랑에겐 아무말도 못해는 이 꼬마주부의 미칠듯한 답답함!
아, 대체 이 남자는 돈을 어디서 찍어내고 있는걸까요?

아무래도 꼬마주부에게 신랑의 비상금이란, 알려고해도 해도 모르겠고, 쓰게해도 해도 그럴수록 더욱 부푸는 요술비밀통장인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