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신 뒤, 2차 대학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C" 대학 의예과에 적을 둔 채, 시간 때우기(?)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곧 미국에 가서 새로 시작할텐데'라는 생각이 가득 차 있으니,
공부는 당연히 뒷전이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당구도 배우고...
여학생들과의 미팅도 열심히 하고...술을 마시며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인생도 논하고... 듣기만 하던 대학 1년생의 즐거움을
쫓아 다니느라 바빴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렸던 일은, 당시 조금씩
시작됐던 가족이민을 '도피이민'이라 격하시키던 여론 때문에,
친구들에게 이민에 대해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확실한 결정이 난 뒤에 알려야지 하면서.....
너무 놀기만 하는 아들이 걱정스러워, "영어공부라도 해야 되지
않겠니?"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고민하던 어느날,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 1 때 영어회화 클럽을 했던 친구들이
모여 다시 영어회화를 배워보려 하는데, 같이 안 할래?"
평소, 영어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고, 이민을 앞 둔 처지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동창 9 명과, 주축이 됐던
친구가 다니고 있던 대학의 일학년 여학생 8 명이 4월 중순 부터
모임을 가졌다.
외국인 신부님을 어드바이저로 모시고, 매주 토요일 모여 2 시간 가량
짧은 영어로 대화도 해보고...한달에 두 세번씩 영작을 하여 회보도
돌리고...가끔 가벼운 데이트로 우정도 다지면서 즐거운 대학생활은
계속되었다. (제 3 공화국의 유신정책에 반대 데모를 하는
대학생들을 막기 위해서, 휴교령이 내려진 2-3개월은 빼고...)
12월 초, 드디어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이민 신청이 통과됐으니
미 대사관에서 비자수속을 밟으라고...
세세한 서류준비등은 어머니가 하셔서, 별로 떠난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막상 신청한 여권을 받아든 순간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몰려왔다.
"이젠 정말 떠나는가?
친구들을 보고 싶으면 어쩌지?
미국에 가서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영어 생활이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걸릴까?
미국 공부가 쉽지는 않을텐데?
꼭 가야만 할까?
....... ?"
겨울이 한참 깊었던 1월의 어느날, 부산에 계시는 외가 친척분들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경부선 기차에 몸을 싣고 우두커니 차창 밖을
내다보는데 스쳐가는 풍경들...앙상한 나무가지...눈 덮힌 산과 들...
얼음 덮힌 강..... 갑자기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목으로 그리고
얼굴로 전해졌다. '아, 이 고향산천을 이제 다시 보기 힘들겠지 ?'
두고 가는 것들을 마음에 꼭 담아보고자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댔으나,
무심한 고국은 가득 고인 눈물에 가려 희미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철아, 잘 가그래이~~"라는 외가 친척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제일 하기싫던 친구들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한명씩, 두명씩 만나 설명을 할 때마다 놀라던 친구들의 모습이,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새겨졌다.
"너, 정말 가는 거니?"
"응! 가긴 싫지만 부모님 결정이니 따라야겠지."
믿기지 않는다고 빤히 쳐다만 보는 친구도 있었고...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아무 말도 못하던 친구도 있었고...
미국 가서 고기 먹고 치즈 먹고 잘 살아라 라며 악을 쓰다가 울먹이던
친구도 있었고.....
모두 다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어느날 밤, 잠이 안 와 뒤척거리다가 일어나,
몇 몇 가까이 지냈던 여학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쓰는데,
끝 부분에 여지없이 따라 붙던 말은,
"내가 떠나 없어도 이곳은 아무 일 없었던 듯 하겠지?
나의 빈 공간은 그저 너와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거겠지?"
갑자기 작아진듯한 내 모습이 싫어 '안 갈래!'라는 강렬한 감정이
솟아 오르다 사그러지고, 또 다시 솟아 오르기를 몇 번...
그러던 나에게 책상 한쪽 끝에 꽂혀 있던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부터 틈틈히 적어왔던 두툼한 자주색 일기장 !!
'아, 바로 이것이다!'라는 느낌이 왔다.
"이걸 남기고 가자 !"
남자 친구에겐 남기기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그 동안 가까이 지냈던
여학생들을 떠올렸는데, 결론은 '영어회화 클럽을 같이 하던 "선이"에게
남기자' 였다.
'일영'으로 봄소풍을 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하러 처마 밑으로
들어갔을 때 뒤따라 피해 왔던 선이. 바삐 뛰느라 엉망이 된 내 자켓의
칼라를 제자리로 돌려주던 그 녀의 손길에서 난생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그후로 가까워져 친하게 지내다가, 여름에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 '상' 이후로 별 이유 없이 조금씩 멀어져 간 그녀 !
조용하지만 깊은 눈망울에, 사려가 깊어 내가 무척 좋아했던 그녀라면
"내 분신"을 남겨도 되겠다 싶었다.
내가 미국 가는 걸 알고있던 선이는
만나자마자 불쑥 내미는 포장된 일기장을 엉겁결에 받아들며
"이게 뭔데?"하고 물었다.
"응, 저~~ 뭔가 너에게 주고 싶어서..."
"뭔데? 뜯어봐도 돼?"
"아니... 집에 가서"
선이와 헤어져 집으로 가면서
'나의 벗은 몸을 그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라는 부끄러운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집에 도착할 때쯤 마음은 평온했고, 마치 끝내지 못하고
있던 숙제를 끝냈다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느낀 일이지만)
일기장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 건가는 생각치 않고,
그저 떠나는 내 생각만 한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대답이 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 일기장이 지금도 그녀 품에 있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