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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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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


BY shinjak 2002-01-22

달리는 자동차의 행진을 내려다 보면서
눈이 내리고 있는 거리를 보노라면
마음이 울적해 진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올 것만 같은 날이다.
그러나 조용히 날이 저무는 오후 한가한 날이다.

상념의 날개는 머언 아득히 머언
20 대초반 꽃다운 나이의 대학시절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농촌 봉사활동을 갔다.그동네 교장선생님의 댁
큰 기와집의 문간채 방 하나를 동네 이장으로부터 배정 받았다.
가위 바위 보로 부엌에 나가 군불을 떼기로 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첫 당번이 되어 호롱불도 없는 부엌에서
나뭇잎을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을 떼고 있었다.
시골의 저녁은 빨리 밤이 되는 듯 칠흙같은 밤으로 생각이 된다.
캄캄한 밤이 되어 아궁이 불은 활활 얼굴을 따갑게 비친다.

그 때.
왠 사람이 부엌으로 들어선다.놀라 쳐다보니 하얗게 이를 내보이며
웃고 서있는 키큰 청년이었다.. 하얀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누구세요? 네 이 집 막내 아들입니다. 방학을 해서 집에 왔는데
오후에 눈이 쌓인 논길을 따라 아가씨들이 줄지어 오는것을 보았습니다.
네번 째에 오는 빨간 코트를 입고 오는 모습을 보았지요.
어디에서 오셨지요? 이름이 뭐예요? 어디 학교에서 고향은 이런 저런 이야기로 아궁이의 불은 우리 얼굴을 따갑게 달구어 주었다.이것 시집과 곶감입니다.곶감과 시집은 그에게 얄궂은 운명의 예시였을까?
흰 창호지에 둘둘 만 곶감과 작은 시집 한 권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준다.

일주일을 그 집에서 묵으면서 우리들은 산에 올라 캠파이어도 하면서
일정에 없는 황홀한 추억을 만들고 떠나 왔다.
마지막 밤이 되어 이별의 저녁상을 받으라는 전갈이 왔다.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한 상차림이었다.
집에서 키우는 씨암닭을 잡아 찜을 하고
집에서 따 말린 곶감 홍시 건너마을 과수원의
사과 배까지 오르고,고들빼기 김치, 고춧잎,톡 쏘는 동치미
백김치,보쌈김치,매로 쳐만든 인절미,호박엿으로 만든 조청
토란잎 부침,동태부침,빈대떡, 집에서 만든 과자 정과 유과
식혜, 수정과, 푸짐하고 맛깔스러운 음식에 기절 할 뻔했다.
아쉬운 이별로 산골의 낭만은 끝이 나고 우리는 버스를 탔다.

그는 연하의 국문과생으로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었다.
그 후,
날마다 날아 오는 큐피트 화살이 담긴 그의 시
애절하고 달콤한 연필로 갈겨 쓴 시는 날마다 나를 감동 시켰다.
답장이 없다고 뒷곁 별채 냉방에서 추위를 잊고 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투쟁을 한다는 편지의 내용에 슬픔까지 담아서,
나는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의 마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그 해 겨울방학은 날마다 그의 시를 받아 읽는
것으로 괴롭게 귀찮게 보냈다고 생각된다.

개학을 하고 나서도,그는 학교도 가지않고 우리학교 교문에서
내가 졸업을 할 때까지 나를 따라 다녔다.
말 한마디 없이 내 뒤를 따라만 다니더니 나는 발령을 받고
멀리 학교를 떠났다.그를 까마득이 잊어 버리고 나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났다.
그 학생은 지금 세월이 흘러 50대 후반이 되었다.
결혼도 하지않고 상사병에 정신이상이 되어 폐인이 되었다는 놀란소식.
우연히 그의 사촌을 만나 들은 소식에 가슴이 저민다.
한 청년의 애절한 사랑을 그렇게도 무시해 버렸다. 세월에
무참히 묻어버리고 잊혀진 그 사람이 그렇게 망가지다니.
이제는 중년이 다 지나가 버린 겨울이 또 왔다.
눈이 가져다 준 죄를 받고 형벌을 받는 기분의 아픈 마음
나는 어찌해야 될까? 해답이 없는 반문에 자신이 원망도 스럽다.

내 하숙집앞에서 밤이 늦도록 담배를 태우고 태우다가
나에게 시를 적은 편지를 건네주고 따나는 그 사람.
낡은군인 시보리잠바를 입은 앙상하고 큰 키에 어깨를 올리고 쓸쓸히
외롭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가슴을 때린다.그러나, 나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만 할 뿐.

눈이 그쳤다.상념의 날개도 접힌다. 애처러운 일.가슴이 시린다.
그를 생각하면 죄를 짓고 사죄를 받지못한 숙제가 응어리지어
나를 괴롭힌다.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우선 연이 아니었다는 것.
키가 크고 나이가 연하라는 시시콜콜한 이유로...
아니 인연이 아니었어.
짝사랑의 아픔이여.
사랑의 파멸이여
사죄받고 싶다.
그의 찬 손을 꼬옥 잡고 눈물을 흘려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