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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은 고백연서


BY Suzy 2001-02-28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당신인데도 이렇게 당신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쓰려니 부질없이 눈물이 먼저 나는군요.

오늘 아침, 잠든 내가 깰까봐서 당신이 뒤꿈치 들고 살금살금 나간 것 다 알고 있었어요.
축 쳐진 당신의 뒷모습 이 나를 또 눈물나게 할까봐서 그냥 자는 척 했어요.

여보, 요즈음 많이 피곤하죠?
오랫동안 내 감기하고 씨름하느라 고생이 많은 것도 알고 있어요.

"내가 아픈 게 낫겠다!"
불쑥 내 뱉는 퉁명스런 당신의 한마디가 얼마나 나를 울렸는지 당신 모르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쯤 했었나요?
너무 오래되어 난 잊었어요, 당신도 그렇죠?
그래도 난 다 알아요, 당신이 나 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것을!

열에 들떠 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는 나를 보다못해 당신은 밤새 글씨를 썼죠.
아예 커다란 붓을 휘두르며 밤을 하얗게 새우더군요.
내 눈에는 당신이 쓴 커다란 글씨보다 그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커 보였어요.

기침으로 고통스레 가슴을 움켜쥐면 어느새 당신은 무우와 배를 갈아 즙을 낸 마실 것을 들고 내 곁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덕분에 이제는 목도 많이 가라앉고 기침도 멎었어요, 고마워요, 여보!

침대에 누워서도 잘 보이라고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 동백을 창문 앞에 옮겨 놓아준 것도 유난히 눈물 많은 나를 울렸죠, 그 모진 강 추위 속에서도 선명하게 피어나는 그 붉은 꽃잎이라니!

올 같이 추운 겨울 날씨에 오랫동안 주차장에 둔 내 자동차가 얼까봐 매일 한번씩 시동을 걸었다면서요?

혹시 그 차가 주인을 잃는 것은 아닐까? 내 손때묻은 핸들을 문지르며 생각 했었다구요?

지하 주차장을 나서니 눈이 많이 내리더라는 당신 말은 하늘을 보며 눈물을 참았다는 말로 알아들었어요, 여보, 정말 고마워요!

미안해요, 이렇게 오래 아플 줄 몰랐거든요, 그까짓 감기로......

의외로 너무 오래 가니까 담당 의사 선생님도 놀라서 그렇게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답니다.
의례적인 것이려니 생각하고 너무 걱정 말아요.
문제가 좀 있다 하드라도 내가 잘 이겨 나갈 거예요, 두고 보세요.

어제 저녁, 내가 끓여준 유자차를 마시며 "당신 안 아프면 정말 좋겠다!"
그 말을 하는 당신 눈가에 맺혔던 이슬은 무슨 뜻이죠?

난 그때 생각했죠,
--이 남자를 혼자 두고는 나는 마음 편히 죽을수도 없겠구나--

여보, 짱구아빠! 이제 우리도 젊지만은 않은가 봐요.
우리가 매일 노래처럼 되 뇌이던 " 이 다음에......." 가 지금 아닌가요?
모든 호강을 "이 다음에...." 하기로 미루어 두었었잖아요.

어떤 시인이 노래했죠, "산 넘어 언덕 넘어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우리 이제 그 산도 그 언덕도 다 넘지 않았나요?

"나도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그 시인이 그랬어요.
우리는 남 따라가지 말고 우리끼리 이렇게 살아요, 여기서.....

"산 넘어 언덕 넘어 더욱 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사람들은 자꾸만 더 먼 곳에 행복이 있다고 그랬어요.
허지만 여보, 우리는 그냥 여기서 살아요, 더 멀리 있는 행복을 찾으려 힘들게 헤매지 말고..... 그만 여기쯤 정착합시다.

오늘 검사결과 보러 병원에 갈 거예요, 별일 없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오늘은 기분이 훨씬 좋아졌거든요, 두통도 덜하고......

여보, 우리 날 풀리면 먼데로 여행 갑시다, 가까운 산도 좋고.
그리고 다음부터 꽃을 사 올 때는 "사랑해!" 라는 말도 슬쩍 하세요,
그냥 꽃다발만 받는 것도 좋긴 하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 당신 덕분에 아들 딸 갖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멋없고 무뚝뚝하고 분위기 몰라서 잔재미는 없었지만.......
더 멀리 있는 행복은 그만 넘어다보기로 했어요,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거든요.

여보, 사랑해요!
너무 늦은 고백은 아닐런지........?

당신도 아프면 안돼요, 아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