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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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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겨울과...일상.(1)


BY 들꽃편지 2001-02-20

창 넓은 버스는 그 시간 그 자리에 번호6을 달고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매시 45분에 출발하는 백화점 버스.
난 이 버스를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삼사일 뜨문뜨문 만난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백화점으로 곧장 걸었다.
쇼핑을 위해서가 아니고 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백화점 관계자가 알면 나 잡혀갈려나?

난 한복집에서 일을 한다.
처음엔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한복집 주인 언니가 공짜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이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요즘은 내가 적절하게 애용을
하고 있는 중이다.

버스에 오르면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다.
앞에서 세번째 창가 자리. 운전석 뒤가 아니고 옆에 칸.
빈 자리가 많아서 이 자리에 못 앉는일은 이변이 없는한 거의 없다고
믿는다. 이 자리에 못앉은적이 한번 있었는데 명절전인가 그랬을거다
아늑하지 않고 찜찜하고 낯설고 그랬다.
학교다닐 때 친하지도 않은 친구자리 앉았을 때가 이런 기분이였다.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 멀끄러미 창밖을 본다.
아직도 2월 언저리엔 겨울이 남아 있지만
햇볕은 가깝게 다가와 며칠전에 쌓인눈이 녹아 도로마다 물구덩이를
만들었다.
버스는 변함없는 위치에 나를 내려 놓고 훵하니 가고...얌체같은
나를 내려 놓으니 신날거다.

한복집 주인 언니는 45살이 되도록 혼자산다.
난 가끔 언니에게 편해서 좋겠다 그런다.
언니는 말은 안했지만 가끔은 내가 부러울 때도 있을거다.
언니는 차갑고 딱딱하고 무뚝뚝인 재봉틀과 어느날은 정답게
어느날은 싸운듯이 마주보며 앉아 있는다.
그 놈의 호들갑스러운 재봉틀 소리는 정을 붙일래야 붙일수가 없는데
언니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재봉틀 소리를
북북득득내며 잘도 정을 붙여 살고 있다.

한복집 유리창은 버스 유리창보다 넓다.
밖에서 안이 다 보이도록 유리로만 지어서 긍정적으로 말하면
찻집에 앉아 있는 것 같고 기분 나쁘게 말하면 유리상자안에 들어
있는 인형같다.인형같이 이쁘다는 말은 아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엔 한복이 주렁주렁 걸려 있고,
옷감이 색지처럼 둘둘 말려 있고,
또 그 옆으로 작은방이 한 칸 있는데,
재봉틀이 두대 놓인 이 방이 부엌이기도 하고 거실이기도 하고
식당이기도 하다.

난 이 곳에서 반나절을 보낸다.
내가 하는 일은 한복옷감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우리나라 전통한복에 문양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글씨도안도 그린다
봄 가을엔 바쁘고 여름 겨울은 그림 그릴 일이 없어 한가하다.
결혼식이나 한갑 진갑 잔치가 있어야 한복을 입으니까
경기도 많이 타고 갈수록 전통한복이 잊혀지고 있어서 요즘은
더 한가해졌다.
그래서 마실올겸 취미생활을 할겸 언니와 차 한 잔 마실겸
겸사겸사 온다.
교통비도 공짜고 커피값도 안들고 운수가 피는 날이면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두루두루 재미 쏠쏠하고 돈도 찔끔벌 수 있다.

검은 자주색 고름에 회색 연연고동색 두가지 색으로 떡살무늬를
그렸다.끝동에도 그리고 백에도 떡같은 무늬로 그렸다.
깃에다 그리는 건 작아서 그리기는 나쁘지만 더 귀엽고 곱다.

집으로 가는 시간.
내린 곳에서 같은 백화점 버스를 탔다.
저녁놀이 하늘가에 넓다랗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야! 자주색 노을이다.
전봇대처럼 죽어 있는듯한 나무.
한달안에 가지 틈틈이 잎이 돋고 꽃이 피려나?
논과 논두렁 사이의 알 수 있는 경계선.
두 줄로 지나가는 어지러운 가로등.
멀찍이 자벌레 닮은 기차 하나 지나간다.
오늘 하루만큼 겨울도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