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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을 기억하며


BY 라니안 2001-02-16

라일락을  기억하며

작년엔 첫눈이 왜이리 늦냐고 아주 목마르게 그리워했더니 그 눈이 겨울내내 끝도없이 내리더니,

이젠 봄이오는 길목을 가로막고 또 이렇게 하염없이 하루종일 펑펑 내리고 있다.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살살 새벽부터 내린눈이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줄기차게 내리다보니 발목을 훌쩍 지나 이젠 무릎을 덮으려하고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그만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섰다.

조그마한 베란다 창으로 볼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가서 마주대한 눈오는 세상은 참으로 운치있었다.

도로와 나무 그리고 아파트가 한데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었고 하늘에서 하늘하늘 쌀가루같은 눈이 끝없이 뿌려지고 있어 한껏 더 멋스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차들은 눈속에 묻혀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을 하고 그나마 몇대 안보여 세상은 텅 비어보였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아파트 담을 따라 나홀로 눈꽃이 핀 가로수길을 걸으며 문득 어린시절이 떠올라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어린시절 우리집 마당 한켠에는 엄마가 아주 애지중지 하시던 커다란 라일락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렇게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린 어느날,

엄마는 볼일을 보러 나가시고 아버지는 우리 다섯 남매를 돌보시다 심심하셨던지

라일락 나무를 지지대삼아 그 옆에 눈으로 미끄럼틀을 만들자고 하셨다.

날은 춥고 마땅히 할일이 없어 방에서 지지고볶던 우리들은

신이나서 온 마당의 눈을 몽땅 끌어다가 라일락 나무 옆에다 쌓아 다져서는 미끄럼틀을 만들었다.

라일락 나무를 붙잡고 미끄럼틀에 올라가서는 한사람씩 엉덩방아를 찧으며 하루종일 엉덩이가 시린것도 모른채, 옷이 다 젖는것도 모른채 미끄럼을 탔었다.

오후에 외출했다 돌아온 엄마는 라일락나무 옆에 만들어논 미끄럼틀과 나무를 휘어잡고 아우성을 쳐대는 새앙쥐가 다된 우리들을 보시고는 막 화를 내셨다.

라일락 나무 얼어죽으라고 어쩌자고 거기다가 눈을 치쌓았냐고 하시며 당장 눈을 치우라고 난리를 치셨다.

주범인 아버지는 입도 뻥끗 못하시고 " 얘들아, 우리 눈치우자~~~" 하시는거였다.

이번에는 단단히 다져진 눈을 부시느라 또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까르륵대니 엄마는 더 약이 오르셔서는

나무만 죽어봐라 어디 내 가만있나..... 눈을 부릅뜨시고는 노려보시지만

다져진 눈을 부셔서 큰 함지에 담아 집밖으로 저멀리 내다버리는 일이 우린 왜 또 그리 재미있었는지...

결국 , 그 라일락 나무는 봄이와도 그 화려한 보랏빛꽃을 피우지 못한채 그렇게 죽고 말았다.

매년 연보라색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필때면 우리집이 참으로 화사하고 은은한 향기에 취해 더없이 행복했었는데 말이다.

봄이면 엄마의 원망을 두고두고 들어내시느라 나중에 아버지는 " 라 " 짜만 나와도 쥐구멍을 찾으시곤 했었다.

갑자기 그 어여뿌던 연보라색 라일락 나무가 그리워진다.

연보라색 라일락나무의 꽃말이 첫사랑의 감동 그리고 우애 여서 그런지 그시절 우리 남매들은 참으로 행복했었다.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기억해내며 코를 킁킁 거려본다.

라일락의 우리말 이름이 ' 수수꽃다리 ' 인데 그 이름보다도 훨씬 화사했던 우리집 뜰에 있었던 라일락 모습이 떠오르며 문득 그리워진다.

하염없이 눈길을 걸어보며 마냥 마음이 따사로와진 날이었는데 ,

저녁에 TV 뉴스를 보니 이번눈이 올 겨울내내 17 번째내린 눈이었고 32년만의 폭설이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