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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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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이유...


BY ns05030414 2001-11-18

가끔씩 '내가 왜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왜 사냐건 웃지요.'하는 싯귀절이 마음에 와 닿아 좋아한 적도 있었다.
왜 사냐고 물으면 웃을 수 밖에 없는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 시의 귀절도 내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얼마 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폐 수술을 받으면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신세를 지면서 까지 내가 살아야할 이유란 무엇일까?'하고...
의사들, 간호원들, 간병인, 친척들,...
돈을 주고 받는 것을 떠나서, 나는 분명 그 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나는 그럼 이 사회에 무엇으로 보답을 하며 사는 것일까?'하는 의문에 나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농담처럼 남편에게 말했다.
"난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딱 한가지 꽃을 원없이 가꿔봤으면 하는 것을 제외하곤..."
그래서 수술하기 싫다는 내게 남편은 약속했다.
수술하고 약 잘 먹고 나으면, 꽃과 나무를 원 없이 가꿀 수 있도록 산을 하나 사 주기로...
그래서 막연히 꿈을 꾸었다.
꽃과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 것도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어제 오후에 국화를 살피려 밖에 나가 있었다.
봄에 시골집에서 옮겨 심은 국화가 아파트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봄에 팔다 남은 국화를 꽃집에서 싸게 사다 심은 것들도 이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버린 국화를 주어다 심은 것도 꽃망울을 매 달고 꽃을 피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잎사귀에 은빛으로 테를 두른 갯국도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쑥부쟁이를 개량한 듯 보이는 사철국화라고 불리우는 미니 들국화도 조그만 보라색 꽃을 나름대로 뽐내고 있었다.

그 때 윗층에 사는 은서 엄마가 내려왔다.
서로 눈 인사를 하고 가려다 은서 엄마가 말을 꺼냈다.
"저기요, 아이들만 두고 잠깐 요 앞 수퍼에 다녀 오려고 하는데..."
나는 거기까지 듣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알았다.
"염려 말고 다녀 오세요. 여기 있을께요."
윗층에 신경을 쓰면서 꽃을 보는 척하고 있는데 은서가 속옷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아직 말을 잘 못하는 세 살 짜리다.
"은서야, 추운데..., 은비는 어떻게 하고 혼자 내려왔니?"
은서는 웃으며 뭐라고 대답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선 입고 있는 오리털 자켓의 품을 벌려 은서를 들어오라고 하니 배시시 웃으며 들어온다.
"은서야, 추운데 들어갈까?"하니 고개를 도리짓을 하면 싫단다.
"꽃 하나 꺾어주면 들어 갈래?"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꽃을 하나 꺾어 손에 들려주고 품에 앉고 이층 은서 집으로 갔다.
은서 동생인 은비가 방안에서 혼자 노는 소리가 난다.
안심이다.
은서는 날 보고 자꾸 들어오라는 손 짓을 한다.
남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고, 아이만 두고 나갈 수도 없어서 신발을 신은 채 엉덩이를 잠시 거실 바닥에 내려 놓고 기다렸다.
잠시 후 은서 엄마가 돌아왔다.
인사하고 돌아서 나오면서 나는 오랜 숙제가 풀린 듯 했다.

이런 게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는 은서네랑 서로 인사하며 사는 것...
꽃을 가꾸기 위해 늘상 밖에서 사는 나는 우리 줄에 사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사온 지 얼마 안되는 은서엄마는 걸핏하면 울어대는 아이들을 잠시 맡길 사람이 필요해도 찾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불과할 지라도 내가, 한가한 아줌마가, 거기 서 있었음에 나는 감사했다.
늘상 꽃이나 가꾸는 한가하고 별 볼일 없어보이는 나였기에, 은서 엄마가 망설이긴 했어도 아이들을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씩 은서에게 꽃을 꺾어 줄 수 있었던 것에도 나는 감사했다.
그랬기에 은서 엄마가 내게 안심하고 아이들을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가하고 하는 일 없어보이는 나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리에 살고있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할 그럴 듯한 이유가 없어도 좋았다.
한가하게 꽃이나 가꾸는 아줌마로 살아도 사는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하는 싯귀절이 다시 마음에 드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