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487

강아지 이름 짓기


BY 이화 2001-11-06

조막만한 말티즈 새끼 한마리 데려오기 전
우리집은 식구대로 강아지 이름 짓느라
무려 석달을 있는대로 머리를 짜내었다.

첫째, 흔하지 않은 이름이어야 하고

둘째, 영어나 한자보다 순한글 이름이면 더 좋고

세째, 좋은 뜻과 우리 가족과의 인연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을 것

아이를 낳으면 무엇보다 이름 짓는 것이 고민스럽듯이
생명을 지닌 강아지 이름 역시 아이 이름 못지않게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시간은 흐르고 강아지가 우리집에 올 날은 다가오고...
하루는 저녁식사 후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그동안 각자 생각해온 강아지 이름을 발표하기로 했다.

남편 : 아빠는 이 이름으로 했으면 좋겠어
광발이! 어때?

아내 : 무슨 뜻이예요?

남편 : 거꾸로 부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이름이야
굳이 말한다면 발이 넓다...
뭐...아무데나 거침없이 다닌다는 뜻이지

가족들: (일제히)
여봇!
아빠!!

남편 : 이상하냐?

아내 : 이쁜 강아지에게 발광이 뭐예요?
우리 집에 와서 맨날 발광하란 뜻이우?

딸들 : 아빠는 이상해
너무 성의가 없으셔요

아내 : 엄마가 지은 이름은 말야
알콩이! 어때?

딸 1 : 음...좋아요 엄마
근데 부를 때 눈을 치켜떠야겠네요

아내 : 그...그러니? - -;

딸 1 : 제가 지은 이름은요
신비! 신비...어때요?

(나머지 가족들 존경하는 눈으로 장녀를 쳐다본다)

남편 : 와...역시 우리 장녀는 수준이 틀리구만

아내 : 당신도 장녀 본 좀 받아요

딸 2 : 맞아요 아빠는 광발이가 뭐예요?
실망했어요

남편 : 뭐 실망씩이나 허허허허(괜히 호탕한 척 웃는다)
(그러다 째려보는 시선을 의식하곤 어색하게...)

딸 2 : 제가 지은 이름은요
밍키! 이쁘죠?

참고로 여기서 딸 2는 차녀로서 평소에도 심각한 공주증세를
드러내는 이른바 공주병 환자임. 언제나 자신이 외국
어느나라의 공주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으며
하루종일 거울보기(지치지도 않음), 레이스 달린 옷을
광적으로 좋아하며 머리는 언제나 갖은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여야 함. 그녀가 어떤 옷을 입든
가족들은 무조건 이쁘다고 해야 함. 진실을 말할 경우
뒷일은 장담 못함.

가족들 : ......
(순한글 이름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남편 : 자자, 그럼 아빠가 두번째로 지은 이름을 발표하께
처음에 결정을 못했으니까 꼭 이걸로 지었으면 좋겠는데...

딸 2 : 아, 광발이 같은 것만 아니면 되요

남편 : 랄지!

가족들 : (일제히) 네?

남편 : 랄지!!
랄지 라구

가족들 : (드디어 폭발한다)

딸 1 : 겨우 지으신 이름이 지랄이예요?
그럼 아까 이름이랑 합치면
지.랄.발.광.
지랄발광이 뭐예요?
아빠는 정말 너무해!

딸 2 : 아빠는 강아지가 우리집에 와서
광견병 걸렸으면 좋겠어요?
맨날 지랄하고 발광하면 우리가 어떻게 키우겠어요?

아내 : (한심한듯 남편을 쳐다보고)
얘들아, 우리집에선 고사하고
바깥에 데리고 나갈 수나 있겠니?
공원에서 "광발아"..."랄지야"...하고 부르면
사람들이 우리 식구들을 제정신 가진 사람으로 보겠냐구

딸 1 : 어휴...안되겠어요
이제부턴 아빠를 빼고 이름 지어요

딸 2 : 맞어. 아빠는 빠지세요

(아내와 딸 둘, 남편을 흘겨본다)

능글맞게 웃는 남편, 그러나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아내 : 엄마가 두번째로 생각한 이름은
만복이!
우리집에 만복을 가져다주는 강아지라고 해서 말야.
천복이보다 만복이가 더 좋지 않겠니?

딸 1 : (봐주듯이)
좋아요. 뜻은 좋네요.

아내 : - -;

딸 1 : 제가 지은 이름은 폭포!
폭포...어때요?
우리의 사랑을 쏟아지는 폭포처럼 맞으라구요.
특이한 이름이죠?

가족들 : (경이, 내지는 감탄스런 표정으로 장녀를 우러러 봄)


딸2 : 음...근데 좀 어려운 이름 같애

딸1 : 너는 내가 말만 하면 어렵다고 하냐?
그럼 밍키...라고 하면 안어렵냐?

(가족화합의 장을 마련하려 하였건만 이건 싸움터 되기 일보직전임)

딸 2 : 아, 됐어.
나는 루비. 루비로 했음 좋겠어.

아...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이 공주의 환상을 어이한단 말인가!

딸 1 : 넌 알파벳도 모르면서 맨날 영어이름만 짓니?
한글이름으로 하기로 했잖어

딸 2 : (종이 위에 삐뚤삐뚤 연필로 쓴다)
밍...키...
(그러나 종이에는 뭉...기...라고 쓰여져 있다)
루...비...
(이번에는 제대로 쓰여진 글자)
(가족들 모두 안도한다)
이것 봐. 한글이잖어.

아내 : 풋...
(손으로 입을 막으며 얼른 고개를 숙인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몸이 부르르 떨린다)

남편 : 당신은...
(아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역성을 드는 척 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욕실로 달려들어간다)


딸 1 : (한심한듯 동생을 쳐다보다가)
그럼 이제 이름만 말하기로 해요
다른 말은 하면 안돼요

아내 : 망또!

딸 ! : 별이!

딸 2 : 애니!

남편 : (변기에 걸터앉아 볼일을 보고 있다)
도끼!

가족들 : (정말...하는 표정으로 욕실쪽을 째려본다)

아내 : 달콩!

딸 1 : 솜이!

딸 2 : 해피!

점점 369 분위기가 되어 가는데...

남편 : (여전히 변기에 앉아 있다)
쌍칼!

가족들 : ......(살벌한 침묵이 흐른다)

아내 : 둑바!

딸 1 : 똘이!

딸 2 : 제리!

아내 : 뚱아!

딸 1 : 미루!

딸 2 : 럭키!

남편 : (여전히 변기 위...)
(이제 막 일어나려고 화장지를 뜯는 중이다)
왜 아빠는 빼구 해?
아빠도 강아지 이름 지었어
사시미!
돼지!
검둥이!(흰색 말티즈에게)
빳다!
송곳!
#$%!@#$%......

아내와 아이들 일제히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힌다. 엉거주춤 일어서는 남편에게
두들겨 패고 꼬집으며 달려드는 아내와 아이들

가족들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아빠를 때린다

딸 1 : 아빠는 조폭 이름 지으세요?

딸 2 : 이쁜 강아지 이름이 도끼와 쌍칼이 뭐예요?
아빠 정말 미워!

아내 : 아이들 보기가 부끄러워
차라리 입을 닫고나 있을 것이지

남편 : (머리를 감싸며 )
어...어...왜 이래...
이집엔 마음대로 말할 자유도 없나?
어...어......

그날의 강아지 이름짓기는 불발로 그치고
남편은 영원한 왕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