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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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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그녀들


BY 이화 2001-10-29

이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하나...
수위를 어느 정도까지 조절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었다.

물론 쓰지 않고 내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두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토록 답답한데 혼자서 비밀 지키고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억울한 마음도 들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도 되고
싶어 드디어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에겐 사이버 친구가 꽤 있다.
대학 동창도 있고 글모임 친구도 있고
동아리 친구도 있고...
일년이 넘도록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을 않다가
올해부터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세월의 흐름은 얼마나 무정한 것인지
사이버에선 그토록 발랄하던 친구들이
어느덧 흰머리가 생기고 주름이 어울리는
얼굴로 나타나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것까진
좋았는데...

그중에 한 명-내가 특히 아끼는 그녀의 이야기다.
자주 전화하고 만나지 않아도 언제나 어제 만난듯
믿음이 가는 친구였기에 여름내내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다. 여름이 거의 다 가던 어느 날 밤이었다.

새벽 두시쯤 그녀를 찾는 전화가 나의 잠을 깨웠다.
중학교에 다니는 그녀의 큰딸이었는데
야심한 그시간에 그녀를 찾는 것이 아닌가.

아줌마 만난다면서 나갔는데요
우리 엄마랑 언제 헤여지셨어요?

잠이 확 깨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음성을 남편도
어느덧 깨서 옆에서 듣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래?

아이의 옆에는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다 화가 뻗칠대로 뻗친 그녀의 남편이 있었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나는 아내와 엄마를 시시때때로
불러낸 나쁜 공범자가 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숱한 외출을 하면서
나를 만난다 하였고 나를 믿은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귀가 시간이 늦고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와도
그냥저냥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그녀와 만난 것은 네 번,
그것도 모두 저녁 식사를 하고 헤여진 것이 전부였고
더구나 근래 석달 동안 만남은 커녕 전화조차 없었는데
나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옆에서 심각하니 듣고 있는 남편의 얼굴 보기가
왜 그리 미안하든지. 그래도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지.
나는 요사이 너네 엄마를 만난 적도 전화를 한 적도 없단다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 오시겠지 걱정마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녀의 생일이었다.
만나서 점심이라도 하려고 전화를 하니
그녀의 말이 이러했다.

나 나가기 힘들어...
전에는 내가 너 만난다면 남편이 아무말 안했는데
요새는 너 만나는거 우리 남편이 싫어해
어떡하니?

아무리 신뢰가 무너진 세상이라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친구라면서 나의 이름을 팔고 나의 신의를 팔아서
저 좋은대로 하고 다니더니 결국 자기 남편에게
나만 몹쓸 사람으로 만들어 놓다니...

나는 너 만나야겠어
어디어디로 몇시까지 나와
너네 남편이 그러는거, 니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런거지
그게 내 잘못이니? 너네 가족들에게 어떻게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그러고도 니가 친구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내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녀와의 약속장소로
나간 것이 이틀 전.

약속 시간은 오후 2시 반이었는데
그녀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5시간 뒤였다.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녀집으로 전화를 해보니 역시나 나를 만난다 하고
오후 2시에 집을 나갔단다.

친구를 만들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던 내가 어렵게 어렵게 세상과의
말꼬를 트고 또래 집단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름대로
어려운 결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또 어렵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 그녀였다.
나의 어려운 결단이 이제 이런 모습으로 나에게
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런 결과를 알았다면
내가 감히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소위 대화라는 것을
하고 싶다고 나설 수나 있었을까?

약속시간으로부터 5시간 뒤에 그녀는 술에 취하고
울었는지 어쨌는지 눈까지 빨개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라는 사람은 언제까지 저를 기다려줄줄 알았는지
자뭇 태연하고 미안한 기색도 없어 보였다.

나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남자를 만났단다.
역시 사이버에서 안 사람인데 남편에게 없는
자상함과 배려심을 가진 그가 좋았단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그만 만나자며
이별을 고하고 오느라 이렇게 늦었단다.

대책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연애 놀음에,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그들의
완전범죄를 위해 나도 모르고 있는 새 그녀는
나를 내세워 그와의 만남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듣게 된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도 가관이었다.
누구는 애인과 몰래 만난지 벌써 5년이 넘었으며
누구는 아무개와 연인이 되었으며
누구는 누구와 동해안 여행을 다녀왔고...

놀고 싶음 놀면 그만이지
왜 내 이름을 팔고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니?

나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이러면 안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는 나보다 이성적이지 않니?
너한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내가 어떡하면 좋은지 니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겠니?
그걸 꼭 듣고 싶어?

아니아니야...

좋아할 사람이 있든?
너 좋다고 속살거리는 그놈도 결국 집에 가면
너 애먹이는 너네 신랑이랑 똑같은 놈이야.
아직 사랑을 믿는 너의 정열이 차라리 부럽다

그녀를 통해 들은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에,
그리고 내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네들을 향해 열었던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나와 안면을 텄다고 나까지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보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싫었고
가정사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치기어린 방황이 아무런 정당성도 갖고 있지 않음을
또한 알기에 그녀와의 기억을 모두 버리기로 한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한다.
가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단다.
취해서 흐느적거리는 그녀를 놔두고 나는
택시를 타버렸다.

인생은 길지 않아
자식들이 보고 있어

그녀에게 내가 남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