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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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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던져 버리고 싶어.


BY 뻘건 우체통 2001-10-29

기억력이 흐려지는거야?
우리가 치악산을 찾던 계절은 여름이였잖아.
비가 내리고,
산자두가 뚝뚝 떨어지고,
밤에 달맞이꽃을 종이컵에 꽂아 머리맡에 두고 잤었잖아.

치악산 자락엔
정말 살고 싶은 들꽃이야기란 찻집이 있었어.
창가에 들꽃이 피고 투박한 나무의자와
주인이 메모해 놓은 메모장엔 들꽃 한송이가 그려져 있었어.
마당엔 빨간 고추가 널어져 있었고,
그 마당가 돌담엔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보랏빛으로 가을을 더 고웁게 채색하고 있었어.
그곳에 서서도 난 한사람만을 생각했어.
이런곳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 했었는데...
그런 꿈을 꾸었던 뜰과 나무와 들꽃과 집과 유리창이
나의 바램처럼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곳엔 우리는 없었어.
너가 떠나버린 그곳엔 나만 서럽게 눈물 내리고 있었어.

너를 잊기위해 봄부터 컴에 나의 마음을 쏟아넣기 시작했어.
새벽까지 잠못이루며 컴에 너를 향한 분노와 증오를 퍼부어 버리곤 했어.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나를 가리고 나를 숨기고 아름다운 척
감성적인 척...
그래서 나를 컴친구들이 뭐라하는 줄 알아?
시인이래..회화적이라 하기도 하고,
나를 보고 뭐라하는 줄 알아?
소녀같고,조용하고 참한 여자중에 여자라고 하더라고...
틀린말은 아니지만
내 가슴에 증오와 복수와 죽음과...이런 것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겠지..
컴에서 만나 친구들에게
내가 생각해도 가식이 많아.
누구를 사기치거나 누구를 이용해 먹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내 가슴에 진실을 숨기고, 웃으면서 감성이 풍부한 소녀같고 시인같은
모습만 보이고 있지.

그래...
자기가 나를 위해 시간을 내 줄 수 없을때,
컴 친구들이 나를 위해 시간은 내어 주고,
나를 위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여행을 다녀주고..
고맙고...
그러나...
내 가슴엔 항상 한 사람만 향한 증오가 도사리고 있었어.

가을의 치악산은 또 다른 세상이였어.
자기가 나를 위해 차 한 잔도
여유로운 풍경을 볼 시간도 내 줄 수 없을 때...
나를 위해 이런 시간들을 내어 주고 즐거워 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
한편으론 다행이고 한편으론 그 친구들이 너가 아님이 슬펐어.

내 사랑은 어디론가 길을 찾아 가벼렸지만
난 너에게서 벗어날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어.
나가기 싫은 자리도 나가고..
있고 싶지 않은 술 자리를 버티고...
떠나고 싶지 않은 먼 길을 가면서도...
항상 너였으면..항상 그대였으면...항상 자기였으면...

덧없는 41살의 가을.
떠나 온 곳을 돌아 보기도,떠나 갈 곳을 바라보기도 서러운 나이.
가벼운 사랑을 찾아 떠났던 그 길이 이제는 보이지 않아.
낙엽처럼 떨어져 땅에 주저 앉지도 않는 연기 같은 사랑.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였어.
그걸아니?
내 삶의 주인공은 항상 너였다는 것...
보기싫어 정말 추하고 저져분한 사랑타령이라니...
그래도 사랑이 남아 있다는 결론을 난 내리면서도
뒤돌아 자꾸 내려다 보면서도
왜 이렇게 추하다는 생각에 도달하는지...

토요일도 일요일도 바쁘게 일을 했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나도 편하고 싶어.
한가로이 저무는 가을을 보고싶고 차 한 잔도 따스한 가슴으로
마시고 싶다고...
그래서...
금요일날 없는 시간을 내고 치악산을 갔었어.
지는 단풍이 더 고은걸까?
잔뜩 가을을 머금은 신나무 단풍을 따서 책갈피에 넣었어.
저녁 어스름 산 길을 돌아나오니
어느 산골집 마당에선 나무 태우는 냄새가 났어.
우리도 모닥불을 지피던 날이 있었지,
꿈같이 어른거리지만 분명 있었어.

집요하게 따라붙는 너와의 환상들...
가느다랗게 속살거리던 너의 목소리들...
생살을 파고 들던 너의 냉냉한 말
"사랑은 변할 수도 있잖아,약속은 못 지킬수도 있는거야"
그 통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컴에 붙어서 넋두리를 했었어.
소설같은 이야기를...
병신같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지만...

가을이... 치악산의 가을이 무리지어 떨어지고 있었어.
너와 걸었던 치악산은 여름이었어.
산자두가 뚝뚝 떨어지고,
계곡물이 무섭게 넘쳐나고,
나무에선 한바가지씩 빗물이 떨어지던 한여름이였는데...
넌 겨울이라고 기억하고 있다니...
알고 있어.
너는 이미 나에게서 벗어나 다른 길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음을...
그래서 나와의 일들이 헷갈리고 엇갈리고 흐려져 있음을...
난 아직도 너와의 일들이 세밀화로 그린 것처럼 정확한데 말이야.
지우려 했었는데 지우고 싶었는데...
너무 자세하게 그렸었나 봐.
그 후로 오랫동안 휙 던져버리고 있었는데
치악산에 가서 한사람만 생각나는 건
고칠 수 없는 고질병에 걸려있다는 걸 알았어.
그냥 놔 두려 해.
가을이 가 듯...
놔 두고 보게 되면 보고 안보게 되면 외면하고 살거야.

덧없는 세상이야.
지겨운 세상이야.
온통 일과 일에 치여서 짜증만 날 때가 많아.
그러면서도 너가 보이는 건.
더 지겹고 더 덧없는 세상 욕심인데...

새벽이야.
너가 좋아하던 신새벽.
난 싫어 이 새벽이..
또 자고 일어나면 일을 해야하거든.
자야지 그래야 하루를 살아낼 수 있으니까.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