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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여, 당신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구나!!


BY 느티나무 2001-10-22

어제는 일요일,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약속도 없어 집에서 아내를
도왔다. 도왔다기보다는 남편인 내가 할 일을 한 것이다.

나도 결혼 후 이사를 제법 다닌 편이다. 처음에 전세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니 부모님의 도움으로 집을 사지 않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겠지. 그런데 처음에는 이사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이사짐을 다 아내가 포장을 했다. 나는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힘든 일을 했다는 것을
안다. 뒤늦은 깨달음이다.

이삿짐에는 아내의 살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동안 사서
버리지 않았던 책 나부랭이가 꽤 된다. 이것이 이사를 다닐 때마다
애물단지가 된다. 버리자니 아깝고 안버리니 이사를 다닐 때마다
짐이 된다. 무게는 오죽 무겁나. 이사 때 마다 이삿짐 센터 사람들
이 "이게 뭔데 이렇게 무겁냐?"는 질문을 해서 아내가 "제발 이것
좀 버리면 안되냐!"고 쫑코를 주었었다. 그런데 한 권, 두 권 모으고
다 나의 눈길, 손길이 다아 있어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난 금요일에 조그만 옷장의 옷걸이 가르막대가 무게를 못이겨
내려 앉았다. 그러니 고칠 수도 없고 해서 아내가 인터넷에 들어
가서 조립식 옷장 겸 행거를 하나 살테니 옷장도 치우고 옷장위에
쌓아 놓았던 책도 치워달라고 한다. 그래서 일요일에 하겠다고 미루
고 말았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요일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했다.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막상 하려니 힘이 든다. 전에 같으면
아내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힘도 부치고 또 남자의 일이니 하기
싫다며 나보고 하라고 한다. 예전 같으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하지 않았을텐데 이제는 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 동안 아내에게
진 빚이 너무 많은 것이다.

먼저 옷장 위에 있는 책을 하나 둘 내리고 나서 장을 두 개 들어
냈다. 장을 들어내는 것은 혼자 하기기 힘든 일이다. 이 힘든 일
을 전에는 아내가 했다. 그러니 성질은 급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혼자 못하니 나보다 키가 큰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1
인데 착해서 아빠의 말에 순순히 응해준다. 조그만해서 내가 업고
다녔는데 이제는 자라서 아빠를 돕고 또 어떤 일은 나보다도 더
잘 하니 대견스럽다.

장을 정리하다 보니 여성용품이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내가 옆에
있던 아내에게 한 마디 했다.

"한 집에서 저렇게 많이 쓰니 생리대 만드는 회사가 돈 벌지 않으면
이상하지. 하느님은 왜 여자들을 이상하게 만들어 매달 불편하게
하는거야!"

"나는 많이 쓰지도 않아요. 당신 딸이 많이 쓰지. 그리고 나도 이젠
한 9~10년만 있으면 쓰고 싶어도 쓸 수도 없어요."그런다.

"무슨 말이야? 당신 아직 새파랜데."

"뭐, 나는 나이도 안 먹고 늙지도 않아요?"

이 말을 들으니 내 맘이 좀 짠해진다. 나랑 결혼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되었다니. 나랑 결혼해서 고생도 많이 했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지. 요즘에는 주름살 수술을 하고 싶다 어쩐다 해도
쓸데 없는 짓이라며 흘려 듣고 말았는데...

그리고 이번에 장을 치우는 일도 이제는 힘이 부치다며 나보고 하라
며 성당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한다. 전에는 퇴근을 해보면 집이
달라진 경우가 많아서 내가 깜짝 깜짝 놀란 일이 여러번 있었다. 살
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세탁기, 냉장고, 장 등 무거운 것을
혼자 옮겨 놔서 내가 질색 팔색을 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허리나
어디 몸을 다치면 누구 고생시킬려고 그러냐고 하면서.그런데 이제는
힘이 없어서 못하겠다니 아내도 이제는 늙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
다.

아내는 성질이 급하다. 그래서 일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치워
야 하는 성미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상당히 느긋한 편이다. 이번에
도 좀 치우고 "10분간 휴식!"하며 아컴에도 들어오고 TV도 본다.
그런데 그 10분이 100분도 되고 200분이 되어서 문제다. 옆에 있는
아내가 언제 끝내려고 그러냐고 자꾸 재촉을 한다. 그러나 나는 누가
서둘면 더 늑장을 부린다. 그러니 아내는 같이 있으면 싸우겠다고
하면서 아예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는 성질 많이 죽었지?"

라고 묻는다. 나는 속으로

"그래, 죽은 것이 아니라 많이 깨달은 것이지."

그런다. 나는 누가 서둘거나 화내고 짜증내면 더 진도가 안나가는
것을 아내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것도 다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혜로워진 것은 좋은데 나이을 먹었
다면 늙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항상 젊다고 생각하고 산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그런데 이제 머리에 흰머리가 하나 둘 생기면서 나도 이제는 늙어
가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또 등에 업고 다니던 애기, 딸 아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나이를 먹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아내라고
항상 피부가 고운 처녀나 새댁일 수 없겠지.

나는 지금의 아내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를 선택해
주었고 또 나의 사랑하는 딸, 아들을 낳아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성질이 급해서 나와 살면서 고생 많이 했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을
잘 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

나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않는 것이라지만 그러나 나는 미안하다. 여자로서 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게 해 줄 수 없었으니
미안하다.

아내여, 당신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구나!! 그리고 전에는 불같은
성격으로 집안일도 겁없이 해치웠는데 이제는 힘이 부치는구나!!
이제 무슨 약속을 당신에게 하겠냐만, 먼 훗날에 "나는 당신을 만나
작지만 행복했었노라!"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 서로 노력하며 살자꾸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