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보다 나은 F2
2001,9,24
아들녀석의 눈썹 위를 대여섯 바늘 꿰매고 막 정형외과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살짝 다쳤다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학교에 달려가 부어터진 얼굴에 하얀 교복은 핏방울로 범벅이 된 아이를 정형외과로 데리고 갔다오니 그때서야 정신이 든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놓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다시 학교로 달려갔다. 아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선생님께 일단은 아이가 이 정도 상처를 입었으니 가해자의 부모에게도 알려달라고 했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외국 학교에서는 폭력을 행사한 학생은 일단 정학을 받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모들끼리 해결을 잘 보면 그만이지만 외국에서는 절대 폭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혈질의 한국 유학생들이 참지 못하고 그쪽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댔다가 학교를 ?겨나는 일이 허다하기도 하다.
아들 녀석도 상당히 성격이 괄괄한데 이상한 일이었고 일단은 내 아들이 얻어맞았다는 게 속이 뒤틀렸다. 돌발적으로 먼저 덤비는 녀석에게 방어할 겨를도 없이 당한 꼴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둘 다 상처 입으면 생활지도부에 불려 다니고 징계 받으니까 참으라고 극구 말린 듯했다. 일단 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아무리 아이들간에 나쁜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때리면 학교 다니는 건 끝장이라는 아빠 이야기를 명심했던 탓이었을까?
엄마인 내가 열통이 터졌다. 학생들과 배를 타며 승선실습 나간 남편에게 알릴 수도 없고 혼자 삭이자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떤 놈이 우리 아들을 눈이 찢어지도록 상처를 내놓았냐? 그대로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이 앞섰다. 일단 그쪽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그 부모도 수긍하며 미안해했다. 앞으로도 같은 학교를 1년 반 더 다녀야하는데 한 반에서 얼마나 불편하겠냐 싶긴 했다. 차라리 맞고 오는 자식보다는 때리는 자식이 속 편하다는 엄마들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이에게 내 마음껏 표현을 하며 가해자 아이를 무조건 욕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교양 같은 것 없는 아줌마였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들에게 엄마가 가만히 있지 않고 문제를 크게 만들어 그 아이를 정학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웬걸 눈두덩은 통통 부은 녀석이 단호하게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자기가 먼저 친구를 놀렸으니 사과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이 또 있어? 얻어맞은 주제에. 얘가 눈 위에 칼자국 같은 흉터라도 남는 걸 몰라서 일거야. 그건 평생을 가 이 녀석아!
그 순간 얘가 농담하나 싶어 아이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순간 내 가슴에 덮인 복수심을 한 꺼풀 벗어내야만 할 것처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녀석이 나보다 낫구나!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아량. 나라면 아무리 그래도 내 얼굴을 찢어놓은 녀석을 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역시 엄마 아빠가 그리 엉터리로 키우지는 않았나 보다. 아들아, 너무 고맙다. 요사이 뉴욕 폭파사건으로 일어난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세상은 서로들 미워하고 용서 못해 갈등으로 가득한데. 그런 너를 착하다해야 할지 바보라 해야할지--- 사춘기라고 엄마한테는 대들기도 하며 속도 끓이게도 하지만 원래 넌 본심이 괜찮은 아이였구나.
저녁이 되자 친구들한테서 계속 위문 전화가 왔다. 얼굴은 어떻게 되었는지, 내일 학교에서 네가 잘못한 것 없으니 우리들이 모여서 선생님께 단체로 이야기 해주겠다는 등 응원꾼들이 줄을 섰다. 요즘 아이들은 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험에 모두들 정신없이 공부할 아이들인데도. 우리 아들 인기 짱이네? 그래, 엄마가 너에게 세속 욕심을 부리면서도 제일 염려했던 건 너의 그 따뜻한 마음씨가 사라질까봐 였어.
내일은 또 성형외과로 가야한다. 아무래도 정형외과에서 대강 한 수술에 흉터가 생길 것 같아서이다. 아마 네 마음처럼 상처도 깨끗하게 아물겠지.
부글부글 끓던 속에 얼음 덩어리 띄운 물 한잔 쑥 들이켰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F1 보다 나은 F2를 주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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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들을 둔 엄마라면 아니 딸을 둔 엄마라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번 경험할 것입니다. 정말 내 아이가 아무 탈없이 자라주기를 기대하는 모든 엄마들의 마음과는 달리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엄마보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힘을 아이에게서 발견하고 저도 놀랐지요. 요즘 아이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이기적이고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아 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