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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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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이버 친구


BY 이화 2001-09-25

그녀는 사이버에서 알게 된 친구이다.
우린 한 백화점 앞에서 처음 대면했다.
강렬한 향수내음이 인상적이었는데
향이 그녀와 잘 어울렸다.

사이버로 대화하다가 친해진 다음
그녀와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아삭아삭 사과를 씹는 그런
맛깔스런 음성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세미 커트머리에 굵게 웨이브가 들어간
봅 스타일 머리 모양을 한 동글동글한
아줌마일 거라고 나 혼자 즐겁게 상상을 했었다.

아마 하늘색 바탕에 빨간 사과가 이쁘게 그려진
자그마한 가방을 팔에 걸고 나올 지도 모른다고
내 마음대로 모습까지 그려가며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웬 걸......

그녀는 light beige 로 염색한
긴 생머리에 무채색 옷, 그리고 몸만큼이나
큰 숄더 백을 걸치고 나왔다.

그리고 예전부터 봐 온 사람처럼
아래위로 나를 한번 슥 훑어보더니
아주 편하게 털석...
조수석에 앉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녀가 맞나?
속으로 생각하는데 그때 그녀가
전화로 들어 귀에 익은 목소리로
차가 밀린다더니 그래두 빨리 왔네?...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데 입는 것, 집 꾸미는 것에 비해
먹는 것에는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나처럼
그녀의 식성이 나와 비슷했다.
그녀가 조금 전보다 약간 더 좋아졌다.

그녀는 아주 달변이다.
그리고 말을 맛깔스럽게 한다.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는데 어떤 사람이라도
그녀와 대화하면 진지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지겹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녀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는데
그것이 그녀의 다른 면을 알게 해주는 것 같아서
아까보다 그녀가 좀 더 많이 좋아졌다.

다음엔 바로 우리집 앞에서 두 번째로 만났는데
나는 화장도 하지 않고 하우스 옷 차림새 그대로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그런데 그녀는 옷 색깔에 손톱색까지 맞춘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볼 때 마다 그녀가 예뻐지는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세번째 그녀를 만나러 갈 때 나는
지난 번 만남 때 예의에 벗어남을 상쇄하기
위해 열심히 두드려 발랐다.
바른다고 청춘이 되랴마는...

그녀는 말과 이미지가 조화되는 사람이다.
아무거나 걸쳐도 멋들어져 보이고
소품 하나도 조화를 이룬다.

대화를 하면 대화가 즐겁고,
바라보면 겉모습이 멋지고
옆에 서면 그녀의 향이 느껴져서
또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공통점도 발견하고
서로의 다른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는데
단점은 주로 나의 것이었다.
흑과 백은 통한다고 했던가?

그녀와 헤여져 집으로 오면서 라디오를 켰다.
가수 전 인권의 '사노라면'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강을 왼편으로 끼고 지루한 올림픽 대로를 달렸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지금의 나이,
헤집어 보면 각기 어려움이 있고
고뇌가 있고 눈물이 있다.
살면서 즐거운 날이 얼마나 될까?

제한속도인 90 km 로 가고 있는 나를
휙 지나쳐 가는 경찰차가 보인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모두 나를 추월해
바람처럼 내달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많은 차들이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헤여질 때의 그녀를 생각했다.
소소하게 사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얘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들은 느낌.
딱히 어려운 생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것도 아닌 현실.

급히 내달려 가 본들 거기서 날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을 다 살고 보면 그 끝엔 죽음 밖에 더 있는가?
그런데 다들 서둘러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
하루하루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그렇게 사소하게...
시인의 말처럼 사는 것이 행복일텐데 말이다.

나는 처음의 속도로 달려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와의 만남이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어둠 속의 계단을 걸어 현관을 여니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남자,
남편이 날 기다리고 있다.

새벽에 라면을 끓여 우린 희희낙락하며
나눠 먹고 그녀가 당신 전화 목소리 멋지다더라...
남편을 약간 띄워주기도 하면서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무엇이든 현실에 굳건한 기반을 둬야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그녀와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편한 사이임을 서로가 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친구 되기를 원하는 다른 많은 사람의
대명사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이 글의 제목도 이렇게 바뀔 수 있다.
"친구 만나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