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하루밤을 자고 온다던 출장길이 예정보다 일찍 일이
끝나는 바람에 당일날 집에 오게 되었다.
초저녁 오늘따라 말 안듣는 아이들에게 일장훈시를 벌이고
지친 나는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자리에 누워버렸다.
퇴근하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남편을 맞는 상냥한 아내에 대한
아쉬움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껏 목소리를 높여서 아이들을 불러댄다.
술기운도 없는 것 같은데 ......
무슨일이지 내심 미루어 짐작을 하며 뒤늦게 일어나 앉으니
자신이 집에 들어 오기도 전에 누워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마구 채근을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피곤하면 누워있을 수도 있는 문제라고
강하게 반박을 해 댔다.
늘 한결같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일은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나도 부족한 게 있을수 있고 어쩔수 없는 사람이라고......
옆에다 불러 앉히고 현금이 담겨진 두툼한 봉투를 내민다.
최근에 남편은 얼굴구경하기 힘들만큼 바빴다.
사람들은 말한다.
바쁜건 좋은거라고......
글쎄다.
바쁘면 뭘해 실속이 있어야지.....
때때로 나의 기대를 저버리곤 하는 남편이 밉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 이런 저런 감정들이 마구 뒤석여서
살고 있는 느낌.....
그랬다.
봄과 가을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이들 하고만 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 좋은 계절에 가족나들이 한번 쉽지 않아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갈 때가 많다.
봉투안에 수북이 담겨진 세종대왕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건 그저 작고 푸르스름한 종이조각일 뿐인데.....
그 한장 한장을 위하여 그가 흘리고 다닌 땀방울에 비하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 입고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서 편안하게
일하여 얻어진 수입이라면 차라리 내 맘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봉투를 건네받아서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는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난 오늘 그의 어깨에 실려 있는 힘을 느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들처럼 마냥 좋아하는 그의 웃음에서
사는게 무엇인지 한숨석인 시름이 녹아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그동안 나는 늘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참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거개의 평범한 여자들이 그렇듯 내게도 그에게 기댈 수 있는
시간이 오는 것 같아서 남편이 모처럼 가지고 온 황금은
그 이상의 큰 의미로 내게 다가 왔다.
세월은
빠르게 흐르지만
믿고 기다리는 사람을 무심히 지나치진 않는가보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나에게 무수한 기다림을 남기곤 하던 그가
오늘은 내가 기댈 수 있는 힘있는 어깨를 하고 내 옆에
그리 서 있는 거다.
뭔가 자꾸만 좋은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 .....
그런 것들이 내 지친 일상을 치유해 줄 수 있겠거니.....
기나긴 여름의 끈적임이 싫어 사람마저 모두가 귀찮아진 계절이
이젠 갔다.
나의 지루한 기다림도 모두 함께 보내 버렸다.
둘이서 힘을 모은다면 아마 혼자서 가는 길 보다는
훨씬 덜 외롭고, 넉넉한 가슴으로 살수 있겠지.....
이젠 그가 나에게 힘이 되어줄수도 있음이 마냥 좋다.
어린아이처럼 때론 투정도 부릴 수 있고
전에 없던 나의 모습을 보이면 또 어떠랴.....
가족을 위하여
무수한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을 그의 뭉툭한 발뒤꿈치가
오늘은
많이 마음에 걸린다.
이른 가을 한낮의 ?빛에 얼굴을 태워가며
어딘가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을 그이에게
한 없는 마음의 박수라도 보내야 할까보다.
황금을 좋아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어깨위에 드리워진 그 힘을 느끼는 일이
더 좋다고 ......
어제 못한 그말을
오늘은 꼭 해야 겠다.
당신이 내게 가져다 준 건
이 세상의 어떤 빛나는 보석보다도
내겐 소중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