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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이야기(5)


BY 도요새 2001-08-24

머리가 반백이 된 성수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동안 귀가 따갑게 들었던
세련된 모습의 성수입니다.
뭐,우리나이가
삼분의 일이라면 모를까
반백이 될 나이는 아니었습니다만
성수의 머리는 그랬습니다.
그게 또 그렇게 어울리는 사람도 첨봤습니다.
제가 나올 줄 몰랐던지(당연히 그랬겠지요)
저를 보는 눈이 점점 커지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네,안녕하세요?"
이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 같지요?
30여년이 지났는데도
30여년전과 똑같은 인사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도,저도
오랜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례적인 인삿말인
변하지 않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았습니다.
사실
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는 예전의 그보다
훨씬 더 멋있어졌는데도 말입니다.
반백의 머리를
빗자욱이 나게 곱게 빗어넘긴 그는
리챠드 기어의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저와 민애와 친구가 나란히 긴 의자에 앉았고
그 맞은편에 성수와 회사후배라는 사람이 앉았습니다.
성수는 30대의 회사후배에게
우리를 친구라고 소개하더군요.
자리에 앉은 성수는 담담해 보였습니다.
저도 참 담담했습니다.
민애만 많이 들떠있었습니다.
성수의 쥬스를 가져다 한모금 마시고 주질 않나,
자기의 쥬스를 성수의 입에 대주며
마셔보라고 강요하질 않나,
평소의 민애는 그런 애가 아닌데 말입니다.
재미있되 결코 교양없거나 경망스럽지는 않았는데
그 날은 그랬습니다.
성수는
담담하게
그런 민애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전혀 들뜸이 없었습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물흐르듯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회사후배가
성수와 민애에게
친구가 아니라 애인사이 같다니까
성수는 아무런 변화없이 조용히 미소만 띄었습니다.
민애는 팔을 뻗어 성수의 손을 잡으며
"우리 애인 맞아요."했습니다.
저와 성수를 뺀 나머지 셋은
그리고나서 깔깔 웃었습니다.
아주 유쾌한 농담을 했다는 듯이요.
등잔밑이 어둡다 했잖습니까.
설마 애인이라면 저렇게 터넣고 얘기하랴하는 심리를
민애는 역이용한 것입니다.
민애는 그렇게 위트가 있고
머리회전이 빠른 아이입니다.
성수가 제게
쥬스를 마시라고 권했습니다.
안녕하세요,안녕히...말고는
처음 나눠 본 다른 말입니다.
감추지도 않고
민애의 눈초리가 뾰족해 졌습니다.
아슬아슬 곡예를 하는 듯한 민애가 참 딱해 보였습니다.
더 이상 그런 민애를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쯤 그런 시간을 견디다가
그만 가자고 일어섰습니다.
민애에 대한 역겨움으로 가슴이 터질 듯 했습니다.
민애는 성수의 차를 타고 가겠다며
저와 친구에게 먼저 가라했습니다.
그러마고 일어서는데
성수가
자기들도 가겠다며 일어섰습니다.
민애가 그의 차에 타려하니까
후배를 데려다줘야 한다며
성수는 여기서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민애는 내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렇게 남 얘기하는데 일어서 버렸다고요.
우리나이가 되어서도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모를 수 있다는 것,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아니,부끄러움보다도 더 앞서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었겠지요.

나갈 일이 생겼네요.
오늘 이 얘길 마치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