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장미를 든 남자>
" 어이~ 미스 김, 올해엔 뭔 소식 있겠쥬?"
박 대리의 느물한 음성에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 때 되면 아시겠죠."
앙칼지게 한 마디 내쏘았다.어디서 굴러온 돌이 뿌리 박힌 돌 밀어낸다더니
사장의 인척이랍시고 입사한지 3년도 안돼 대리 자리 차지한 작자가
할 일이없으니 별걸 다 참견한다고
그녀는 속으로 입을 삐죽였다.
( 나 나이 먹은데 지가 뭐 보태준거있나? 지도 총각 딱지 못 뗀 주제에......"
그러나 그녀는 박대리의 짖궂음에 대한 불쾌감을 얼른 떨쳐버렸다.
오늘 저녘엔 근사하고 가슴 설레는 만남이 약속되어있는 것이다.
노란 장미 29 송이를 안고 올 남자.
그녀 나이가 29살이고 노란색 장미를 좋아하므로, 또한 자신을 쉽게 알아보게하기
위해 그 남자는 29 송이의 노란 장미로 그녀와의 첫 만남을 장식하겠노라했다.
그녀가 그를 만난것은 채팅 사이트에서였고 지난 6개월간 그들은
처음의 탐색전과 채팅 친구로써의 과정을거쳐 편안하고 아릿한 감정을 키워왔다.
같은 도시에 살았으므로 그들은 좀더 일찍 만나볼 수도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좀더 무르익어 신뢰와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직업이나 가족 사항 정도는 서로 알려줬지만 그들은 채팅으로만 만났다.
지난 6개월 동안 그녀가 파악한 그는 성실하고 너그럽고 직업도 괜찮은듯하고
장남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썩 괜찮은 신랑감이었다.
내성적이고 다소 소극적인면이 있어보이기도 했지만 그점이 외려 그녀에겐
그의 성실함을 어필 시켜주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묘한것이어서 처음엔 심심 풀이 장난 비슷하게 시작한
사이버에서의 만남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향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갔다.
언제 부터인지 그녀는 그가 현실에서의 만남을 신청해주기를 기다렸다.
며칠전에야 그는 조심스레 만남을 제의해왔고 그녀는 뛸듯이 기뻤다.
이제 29 송이의 노란 장미 다발과 함께 그녀는 그를 만나는것이다.
으스름이 내려 깔리는 저녘.
그녀는 그와의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했다.
옷 매무새를 다시 한번 살펴 보고 마음을 진정 시키기위해 길게 심호흡을했다.
그녀가 출입문께로 막 다가설 때 안 쪽에서 문이 열리고 한 떼의 남여가
우르르 몰려 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잠시 멈추어서서 그들이 다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 순간 무심코 몰려 나오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눈부시게 노오란
장미 다발이 시야에 들어 왔다.
그녀는 너무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며 출입문 옆으로 비켜섰다.
창가 쪽 테이블 위에 노란 장미 다발을 올려 놓고 옆 테이블의 두 아가씨 쪽으로
느물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남자는 바로 박 대리가 아닌가?
그녀는 황급히 뒤돌아서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이버에서 사랑을 주고 받은 그 진실하고 멋진 남자가 바로 저 박 대리라니!
황당함에, 배신감에 그녀는 치를 떨었다.
행여나 박 대리가 자신을 보지 않았을까 염려하며 노란 장미 29 송이의 환상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 돌아갔습니다.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요?
연락 기다립니다.>
매일 그녀의 접속을 기다리고 있는 그 남자의 메일.
회사에서 날마다 대하는 박 대리의 느물한 웃음에 이를 갈며
그녀는 야예 그 채팅 사이트를 떠나버렸다.
6개월 후의 어느 월요일.
피곤한 모습으로 출근한 박 대리는 전날밤의 술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 간밤에 꽤나 뻑적지근하게 마신 모양입니다."
신입 미스터 최가 과장의 눈치를 살펴가며 슬쩍 박 대리에게 물었다.
" 어~ 말마...어제 친구 자슥 하나가 장가 갔거든.
근데 그 자슥이 장가 가면서도 내 맘을 아프게 하더란 말이야..."
옆자리의 그녀는 고소를 머금었다.
( 저 인간이 친구 장가간게 속아팠던 모양이네.....)
" 집안 어른들의 강권에 중매로 결혼했는데 말야 그 자슥한텐 죽어도 못 잊는 여자가 있었더란 말야.."
" 그 여자가 누군데요?"
미스터 최가 또 과장 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 응, 그 여잔 자슥이 반년 동안 채팅으로 사귄 여자야.
채팅으로지만 정말 사랑했다더군.자슥이 좀 내성적이라 잘 표현 못하고 있다
용기내서 처음 만나기로 했었지.
혼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며 나보고 같이 가지고 부탁하더군.
그 방면엔 워낙이 맹탕인 자슥이라 잠깐 분위기만 잡아주고 난 빠져 나올
요량으로 동행했지.
짜아슥~~~ 노란 장미 29 송이를 안고 약속 장소에 나랑 갔는데
자슥이 점심에 뭘 잘못 먹었는지 아님 너무 긴장해서 였는지
거의 5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더군.
그렇게 화장실 들락거리며 30 분을 더 기다려도 여자가 안 오는거야.
그래서 난 먼저 거버렸고 자슥은 혼자서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렸던 모양이야."
" 그럼 그걸로 그 여자와는 끝이 었나요?"
" 뭐 그런 셈이지 그 후 아무리 멜을 보내도 응답이 없더래.
자슥 무지 애간장 태우며 열병 앓았지.
술 한 잔 먹고 눈물까지 쏟아내면서 하소연 하더군.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었다고....... 한 번도 만나본적은 없지만
평생 가슴에 새겨 둘거라고...그 자슥 썩 괜찮은 인간인데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야.
그러더니 중매로 어제 장가갔지. 지금 제주도에서 단꿈 꾸고 있겠지."
" 그 여자는 왜 약속 장소에 안나타나고 연락도 안했을까요?"
호기심 많은 미스터 최가 또 물었다.
" 낸들 알 수 없지만 뭐, 뻔한거아냐?
폭탄이거나 유부녀이거나 그 자슥을 심심풀이 장남감으로 가지고 놀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혹 모르지.약속 장소로 오다가 교통 사고로
사망했는지....어느 누가 알겠나? 하하하...."
그녀는 머리속이 하얗게 비어가는듯한 느낌으로 사무실 유리창 너머
눈부시게 파아란 가을 하늘을 바라 보았다.
무심한 솜털 구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의 29 번째 여름은 그렇게 깊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