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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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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속치마


BY my꽃뜨락 2001-07-01


장롱서랍정리를 하다 한쪽귀퉁이에서 야실야실한 까망 속치마를 발견하게 되었
다.
"어! 이런걸 언제 사두었지?"
나는 원래 치마를 안입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속치마를 사놓고도 남의 옷 보듯
까많게 잊어버린 것이다.
"아하!! 그렇지." 한 십여년 전,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 마누라로부터 자극받아
사놓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처박아 둔 것이로구나.

그때, 우리는 경기도 변두리 연탄 때는 13평 주공아파트에 살고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남편과 나는 일찌감치 성공해서 넓은 아파트에 여유있게 살고있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실컷 놀다 여자는 여자끼리 잔다고 그 마누라와 같이 방으로 들어왔다. 워낙 친
한 친구이다보니까 마누라끼리도 너니내니 트고지내게 된 처지이다 보니 불편할
게 없기 때문이다.


기름보일러로 뜨끈뜨끈한 방이라 나는 망설임없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버리고 내
복바람으로 이불 속으로 쑥 기어들어갔다.
"아니! 자기, 잘 때 그런 차림으로 자? 무드없이 그게 뭐야. 자기 신랑 이런 마
누라와 살다니 너무 안됐다."혀까지 차며 딱해하는 그 애 표정을 보는 순간, 나
는 황당했다.
"내가 어때서?"
유난히 추위를 못견뎌하는 나는 항상 내복차림으로, 그것도 두툼한 에어메리로
중무장하고 자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 아파트는 연탄아궁이라 아무래도 썰렁한 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무드있는 것인데?"


항상 애교가 넘치는 만년문학소녀라 이름대신 '소녀'로 불리는 그 친구에게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남자들이 말을 안해 그렇지, 얼마나 센스있고 나긋나긋한 여자를 좋아하는지 알
아? 가뜩이나 예쁠 것 없는 마누라가 꾀재재한 모습으로 문열어줘봐라. 정이 십
리는 떨어져버릴걸."
"그래서 밖에 나가 딴짓하는거야. 그러니까 자기도 이제부터 신랑한테 신경 좀
써라."
그러면서 그 친구는 자상하게 신랑한테 섹시하게 보이는 모습을 예를 들어 가르
치기 시작했다.
우선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엷은 화장을 하고, 잠옷대신 까만 속치마를 입어라.
검은 색이 이외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색깔이란다. 와인을 한 잔 준비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고...
"야! 그렇게 입었다간 신랑 들어오기 전에 동사하겠다. 그런 짓도 중앙난방에서
나 가능하지. 우리같은 연탄아궁이 집에서는 택도 없다."
그리고 내가 안하던 짓을 하면 우리 신랑은 틀림없이
"미칫나?" 보나마나 한마디로 문질러 버릴 것이다.

그렇게 농담따먹기로 하룻밤을 노닥거리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약간 신경이 쓰
이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비문화적이고 삭막하게 살고있는 것이 아닐까?
그 놈의 속치마가 몇푼이나 간다고, 조금만 신경쓰면 그 친구말마따나 알콩달콩
재미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텐데... 나는 왜 이렇게 멋도 없고 둔할까?

그 후! 나는 큰 맘먹고 레이스도 화려한 까망 속치마를 구입했다.
그러나 그 속치마를 입었었는지 신랑의 반응은 어땠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이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멋대가리없이 살고있다.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