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그 여행의 끝__
"계장님 뭐 좋은일 있으신가 보네요?"
동료 직원 미쓰 김의 말에 " 좋은 일은 뭐 좋은일...."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입가에 스물스물 번져나는 미소를 지울 수 없다.
" 계장님 얼굴에 되게 좋은일 있노라고 딱 쓰여 있는데요?"
" 인생은 즐겁게 살아야지...안그래?"
그는 능청맞게 흐흐 웃으며 미쓰 김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피했다.
(저러니 시집도 못가고 팍팍 늙지.)
그는 아침 부터 풍선 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비밀스런 기분을
미쓰 김에게 들킨것 같아 표정을 가다듬고 책상 위의 결재 서류에 시선을 박았다.
그가 사이버 채팅을 시작한건 반년쯤전의 일이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 했는데 날이 갈 수록 재미가 느껴 졌다.
퇴근 시간 후 사무실에 혼자 남아 채팅을 하기도 했고
귀가 해서도 아내에겐 잔무 처리를 한다며 옆에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하고 채팅에 열중 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여자들과
음악을 듣고 낭만적인 대화를 한다는게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아내의 불평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그러다 어느날 밤엔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는데
그 일로 한바탕 부부 싸움을 한 후 부터 그는 아예 퇴근 후엔 피씨방으로 직행 했다.
채팅에서 만난 여자와 서로간에 부담 없는 사랑을 한껏 나누고 있다는
후배의 경험담에 그는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그런일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정말 열심히 채팅을 했다. 두달쯤전 그는 드디어 풀꽃 같은 한 여자를 만났다.
< 갈뫼......가을 산이란 뜻이죠? 님의 대화명 참 맘에 들어요.
저 가을산을 너무 좋아 하거든요.>
미지의 여자로 부터 이런 쪽지가 날아온 것이다.
그는 풀꽃이란 대화명의 여자와 거의 매일 채팅으로 만났다.
풀꽃은 평범한 전업 주부라 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좋아하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김남조>의 시를 좋아 한다는
풀꽃의 다소곳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에 그는 아내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매력을 느끼며 흠뻑 빠져 들었다.
멋과 낭만을 아는 외로운 여자___생활의 때와 먼지로 완전 무장한 아내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드디어 그는 벼르고 벼르다 풀꽃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사이버에서가 아닌 현실에서 만나고 싶노라고.
풀꽃은 처음엔 거절 했다.< 챗에서의 만남은 챗에서 끝내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럴수록 그는 마음이 달았다.며칠 동안 집요하게 풀꽃을 설득했다.
<만나서 뭘 어쩌자는게 아니다.그냥 한번만 만나자.
이렇게 내 마음을 송두리채 뒤흔들어 놓은 당신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
마침내 풀꽃은 만남을 허락 했다.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풀꽃은 푸른색 투피스 차림에 책 한권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겠노라했다.
라이브 카페<미네르바>의 실내는 은은한 조명과 잔물결 처럼 일렁이는 음악이
환상적인 분위기였다.아직 초 저녘이어서인지 실내는 비교적 한산했다.
저만큼 구석진 자리에 푸른빛 옷에 어깨 길이의 생머리를한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그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 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음
여자의 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얼굴을 약간 숙인 옆모습이
얼핏 보아도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시집 한권. 그는 다시금 심호흡을 한다음 여자의정면에 섰다.
" 실례지만 풀꽃이신가요?"
여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여자의 입가에 비수 처럼 묻어나는 냉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착각 이겠지!! 이건 착각 일거야.
" 바깥에서 한눈 팔다 보면 자신의 집 기둥 뿌리 썩는다는걸 아셔야죠."
13년을 늘 들어온 목소리이지만 지금은 시퍼런 칼날로 그의 가슴에 꽃히는
아내의 목소리.그는 휑하니 일어서 나가는 아내의 낯선 뒷모습을
다만 멍하니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