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우리가 어디서 무엇으로 만났더라도__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만 일어나요."
미장원을 다녀온 아내가 짜증스레 말했다.
"빨리 일어나서 외출 준비 하세요."
"고단해서 죽겠는데...."
"어젯밤에 과음 했으니 그렇죠 뭐...당신 몇시에 들어 온줄 알아요?"
더 꾸물거렸다간 아내의 바가지가 속사포 처럼 터질것 같아 그는 마지 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아내는 부산하게 화장을 하기 시작 했다.
셋째 아이의 출산 예정일이 보름쯤 남은 아내의 배는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가뜩이나 작은 그녀의 키를 더욱 작아보이게 했다.
오늘 아내의 여고 동창생 부부들과 점심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아내의 친구들은 더러 본적이 있지만 남편들은 첫 대면 이어서
그에겐 마뜩찮은 자리였다.
황금 같은 일요일을 예의 차리고 체면 치례하며 따분하게 보낼 생각을 하니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욕실로 향했다.양치질을 하다 그는 문득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어젯밤에 만났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거리엔 어둠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고 뒷골목의 술집마다엔
불빛이 낭자하게 흩트러져 있었다. 빈 자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주모의 안내로 일행없이 혼자인 남자와 합석을 했다.
그와 남자는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포장 마차에서 직장 동료와 일차를 했으므로 그는 제법 취해 있었고
남자도 적지 않게 마신듯 눈빛이 풀려 있었다.
"형씨, 난 말이요 이날 이때까지 마누라 아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개미 처럼 죽어라 일만 했단 말씀요. 근데도 젠장맞을 여편네
서방 알기를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큼도 안여긴 다니까............
퍼질대로 퍼져갖구설랑 이건 뭐 두드려도 안열리는 돌문 같으니...."
사내는 소주 한잔을 훌쩍 마시고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돼지 순대 한점을 우물우물 씹으며 사내는 비밀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형씨, 우리 어데 재미보러 갈라오?거 내가 아는 마마한테 가면
끝내주는 아가씨들이 득시글 한데..."
그는 잠깐 망설였다
"나야 예전 부터 뒷골목 엔간히 밝히고 다녔지만 형씨는 골샌님 같소 그려.......
배 지나간 자리 어디 흔적이나 남는 답디까?"
술 기운탓 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만삭인 아내 때문 이었다.
벌써 한달 넘게 아내는 그를 단호하게 거부해 왔다.
붉은 불빛이 별 처럼 부서져 내리는 마마 집에서 숏 타임으로 간단하게
몸을 푼 그들은 아주 오래된 허물 없는 친구인양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시의 밤 늦은 거리를 헤집고 다시금 포장 마차에서 소줏잔을 기울였다.
모 호텔 커피 숍엔 아내 친구들 부부 3쌍이 먼저와 있었다.
갈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한 남자를 본 순간
그는 지난밤 만났던 사람임을 첫 눈에 알아 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시선이 맞부딪친 그 순간 공범으로서 무언의 협상을 끝냈다.
"여보, 인사해요 이분 혜영이 바같분이세요."
아내의 또랑또랑한 음성을 들으며 그는 아주 정중하게
그 남자와 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