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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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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이야기 5--- 새와 둥지 >


BY 금빛 누리 2001-06-14

" 여보, 이게 뭐죠?"
밤 늦게 귀가한 남편의 외이셔츠를 받아들다 말고 그녀는섬뜩함에
부르짖듯이 물엇다. 외이셔츠 한쪽 소매 어깨 부분에 너무도 선명하게
찍혀있는 여자의 지분 자국.
" 뭔데 그래? 어? 그게 어디서 묻은거지?"
당혹스러움을 역력히 드러내며 남편은 어쩔줄 몰라했다.
" 어~~ 그러고 보니 아마 술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종업원이 묻힌 모양이군."
놀란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슬며시 외면하며
남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래요? 그런거예요?"
왠지 모르게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아파트 화단의 목련이 만개했다.눈부시다 못해 눈물이 날것 같았다.
잎도 없이 저 혼자 핀 그것은 처음부터 화사한 꽃이었다.
세탁기를 돌려 놓고 집안 청소를 하면서 그녀는 자꾸만 커져가는 정체불명의 불안감에
안절부절했다.석달전 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전시회에 갔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여류화가의 귀국 작품전 이었다.남편의 고교 동창이라했다.
윤기나는 까만색 투피스에 가슴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꼿은 긴 생머리의 여자는
반색을하며 그녀 부부를 반겼다.
"류금채라고해요.와주셔서 감사합니다."우아하고 세련된 미소를 머금고 금채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했다.
" 네, 뵈어서 반갑습니다.
그녀도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어째선지 남편 등뒤로 숨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류 화가의 모습이너무 눈부셔서였을까?
"영우씨, 부인이 아쭈 미인이신데! 허긴 영우씨 눈이 엔간히 높아야지?"
남편이 준비해간 꽃다발을 안아든 금채는 아름답고 빛나 보였다.
뒤에 전해들은 소문으로 금채가 유학 시절 결혼한 남편과 이혼하고
영구 귀국했으며 그녀 남편 영우의 첫 사랑 이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금채와 영우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 사람은 영우 친구의 아내였는데
그 부인은 침방울 튕겨가며 금채와 영우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했던가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라도 하는듯 구구절절이 엮어 내었다.
남녀 공학 이었던 고교 시절 부터 두 사람은 가까웠으며 대학생이되어 사랑을 꽃피워
장래 결혼 약속까지 했었다고했다.
영우가 군복무중일 때 금채는 홀연히 미국 유학을 갔고
거리는 사랑과 반비례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음인지
금채는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서 재미 교포 사업가와 결혼을 했다.
그 소식을 접해 들은 영우는 죽음 같은 절망과 배신감으로 한동한
방황했노라고....그러다 단념하고 마음을 잡았으며 그녀를 만나 결혼했다는것이다.
수다스러운 부인으로 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부터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막연한 불안감 이었다.
영우에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고
귀가 시간에 예전 같지 않은 신경이 쓰여졌다.
그랬는데 전날 밤 남편 영우는 기어코 와이셔츠에 여자의 지분 자국을 묻혀 온 것이다.
오월의 장미처럼 아름다운 여자.화가로서의 명성 또한 거머쥔 여자.
그 금채에 비하면 그녀 자신은 너무도 평범한 전업주부인 것이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던중 우연란 기회에 영우를 만났다.
영우는 과묵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깊고 선해보이는 영우의 눈매는 그녀를 한없이 빨아 들였다.
사랑했고, 결혼했고 두명의 아이를 두었다.
성실하고 가정적인 남편과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두 아이로 인해 그녀는 세상에 부러울것이 없는 여자였다.
그 전시회에서 금채를 만나기전까지는.

" 당신 이따 자녘 때 시내로 좀 나오겠어?'
영우로 부터 생각지도 않은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녀가 점심도 거른채
딱히 하는일도 없이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는 오후 무렵 이었다.
" 왜요? 무슨일있어요?"
" 아니, 그냥.. 당신과 오랫만에 단둘이 오붓이 저녘먹구 싶어서그래."
통화를 끝낸 그녀는 한층 가증되어오는 불안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들을 집에두고
그녀만 나오라고 할 까닭이 없는것이다.

마치 모래를 씹는듯한 느낌으로 어떻게 저녘을 먹었는지 모른다.
"입맛이 없어? 당신 요즘 봄을 타는 모양이네."
그녀는 결국 반도 먹지 못한채 수저를 놓았다.
" 우리 강변에 바람 쐬러갈까?
당신이랑 이렇게 오붓하게 데이트해본지두 오래전인데... "
강 바람이 부드러웠다.강 건너편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동화속 꿈의 나라처럼 아름답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걸까.아직 조금은 차갑지만 살랑거리며 다가와
그녀의 빰을 부드럽게 애무하며,
솜사탕처럼 달작지근한 봄밤은 강 물결을 타고 흐른다.
강 뚝에 바람을 안고 서서 영우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불이 빠알갛게 타들어가고 영우는 한동한 그렇게 침묵하고 서있다.
그녀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목이 칼칼해져서 얼음물이라도 마셨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여보,당신 요즈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이윽고 담배 한개피를 다 태운 영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 혼자 걱정하지 말구 무슨일이라도 좋으니 말해봐.
그녀는 영우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했던터라 그저 입술만 잘끈거리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 얼마전부터 당신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같지 않음을 느꼇어.
무엇에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고 생각되더군.그게 무어지?
여보, 감추려하지말고 속 시원히 털어놔봐. 우리는 부부야.응?"
깊고 선한 눈으로 영우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이참에 다 이야기하자.
또 다시 그녀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 지난번에 전시회했던 여자.....당신 첫 사랑이었다죠?"
" 그랬었지.그런데 새삼스레 왜 묻는거지?"
" 그냥요.우연히...알게됐는데요 차라리 모르는편이 좋았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올것같아서 강 건너편
휘황한 불빛을 눈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그녀의 존재가 당신한텐 중요한거였어?"
" 모르겠어요.나 자신두요.그냥...솔직히 불안했어요.
" 이런 바보 같으니..." 영우는 어이없다는듯 실소를 머금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그 여자는 나에게 빛바랜 추억일 뿐이야.당신은 엄연한 나의 현실이자 미래이구.
왜 그런 쓸데없는 기우를 하는거야? 그날 전시회에 갔던것은 동창으로 갔던거구
그 후론 그녀를 만난적도 없어.아, 어젯밤 와이셔츠건은 미안해.
저녘 식사만으로 끝내려했는데 어쩔 수 없이 2차로 단란주점에 갔었거든.
앞으로 조심할께.
그녀는 작은 새처럼 영우의 품에 안겨서 이제는 흐르는 눈물에 앞이가려
아스라히 빛무늬를 이루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봄밤은 이제 적당히 깊어 가늠할 수 없는 시간속으로 서서히 침몰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