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중국의 이 회사의 요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59

<부부 이야기-슈퍼집 여자>


BY 금빛누리 2001-06-10

입술 꼬리에 애교점이 있는 슈퍼집 여자는 하루 종일 다섯평 남짓되는 가게 안에서
가게문이 여닫힐 때마다 상냥한 웃음을 풀풀히 날렸다.
길건너 이층집 할머니가 우유 한 통을 사가며 한참이나 늘어 놓는 웅얼거림이나
전날밤 부부 싸움을 했다며 남편 흉, 시댁흉 줄줄이 굴비 엮듯 엮어내는
미장원집 여자의 푸념도 넉넉하게 들어주고 세탁소집 꼬맹이가
300원짜리 과자를 집어들고 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고사리손으로 내어밀면
차마 되돌려보낼 수 없어 그냥 받고 말고, 가게앞을 빗자루로 쓸다가
바로 옆의 비디오 가게 앞까지 쓸어주면서 세명의 아이와 셀러리맨인 남편의
치닥거리에 하루가 늘 비슷비슷한 넓이와 깊이와 색깔로 여물었다.
오전 6시에 가게문을 열고 자정이넘어서야 가게문을 닫는 고단함이 있었지만
결혼 15년을 한눈 한번 팔지않는 남편과 세 아이가있어 그녀는 고단함 조차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결혼 10년만에야 가까스로 마련한 25평짜리 아파트를 전세 놓고
살림방 두칸이 딸린 슈퍼를 차린것은 순전히 자라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박봉인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세아이의 학원비조차도 벅찼으므로
그녀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들을 이것저것해보다 작년에 슈퍼를 차렸다.
늘 잠이 부족해 손님이 뜸할때면 꾸벅꾸벅 졸기도하고 날이 좋은날엔 더러 갑갑증에
몸을 비비꼬기도하면서 그래도 조금씩 늘어가는 적금 통장과 학교 마치고와선
신나게 도복으로 갈아입고 태권도 도장으로 달려가는 아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거칠어진 손과 잔주름 늘어가는 얼굴의 서글픔을 상쇄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아침부터 넋을 놓고 있었다.
담배 한갑을 사든 남자가 내민 지폐에 거스름돈을 내어줄 생각도 않고
그냥 멍했다.
" 하이고, 봄은 봄인가부네.그리 넋 놓고 앉아 있는거보니...."
세탁비누를 사러온 아낙이 던지는 말에 그녀는 희미한 웃음으로 답했다.
어제 오후에 받은 한통의 전화가 평온하기만하던 그녀의 일상에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킨것이다.
"상호 엄마. 뭐 좋은 일있어?"
전화를 한 사람은 남편 직장 동료이며 같은 친목계원의 부인이었다.
" 좋은 일은....왜?"
" 가게 좀 넓은데루 얻어가는것 아냐?"
" 그게 뭔 소리야?"
" 어머머머.. 그으래? 거 이상하다.우리 그이말론 상호 아빠가 얼마전에
가퇴직금 신청했다던데......뭐 가겔좀 큰걸루 얻을라고 한다면서 말야..."
그녀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릴뻔했다.
그럴리가 없는데?..... 그리도 자상하고 가정적이며 성실한 남편이 아내 모르게
가퇴직금 신청을 하다니.... 도데체 뭐에 필요해서? 그리구 한마디 상의도없이 말이다.15년을 근무했으니 결코 적지않은 금액이다.
그러고보니 요 얼마동안 남편이 좀 이상했다.
평소에 거의 술을 입에대지 않는 남편이 이삼일이 멀다하고 술내음 풍기며
밥늦게 귀가했다.남편 말로는 직장 동료들과 회식이있었다했다.
고향 친구를 만났다고 하기도 했다. 한밤중 잠결에 그녀는 남편이 뒤척거리며
내뿜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무언가 근심거리가 있는듯했지만 그녀는 별로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도데체 무슨일이기에 몫돈이 필요한것일까?
설마 남편에게 여자가 있는걸까?
두어달전에 남편이 어떤 여자와 단둘이 승용차를 타고 가는것을 보았다던
이웃집 여자의 말이 떠올라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안일에 가게일에 바쁘고 피곤해서 손질할 새없이 방치한 기미낀 얼굴과
오갈데없이 아줌마 스타일인 짧은 커트 머리.무릅 튀어나온 바지에 헐렁한 셔츠.
눈 아래 주름은 언제 생겼을까?
어제밤에도 남편은 조금 늦게 귀가했다. 요근래 부적 어두워보이는 얼굴로
왠지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듯한 눈치였다.
가퇴직금 신청건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어 그녀는 속으로만 가슴을 앓았다.
" 오늘밤엔 물어봐야지.여자가 생겼다면 솔직히 말하라구말야.....
속이구 속으면서 어떻게 살수 있어?"
갑자기 울음이 복받쳐 올라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이를 악물었다.
( 나쁜 인간... 내가 자길 얼마나 믿었는데, 자기믿고 이 고생하는데.....
나쁜넘, 진짜 나쁜넘..흑흑....)
입술 꼬리에 애교점이 있는 슈퍼집 여자는 종일을 애증의 샘물을 퍼올리며
가게문이 여닫힐 때마다 풀풀 날리던 웃음도 잃어버린채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자정이넘어 남편이 가게 셔터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가게 불까지 끈 남편이 왠지 눈치 보는것처럼 쭈삣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부시럭거리며 겉옷을 벗는 남편의 등뒤에서 잠깐 심호홉을 한 그녀는
착 가라 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 당신, 솔직히 말해봐요.여자 생겼어요?"
" 뭔소리야?여자라니?"
바지를 벗다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돌아보며 남편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 날 속이려하지말구 솔직히 말해요.맞죠? 맞죠?'
그녀의 음성이 갑자기 격양되고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 여보, 진정하구 차근히 말해봐. 여자라니? 도데체 무슨 소릴하는거야?"
" 당신... 회사에... 가퇴직금 신청했다며요?
여자가...... 생겨서.... 몫돈이 필요한거죠?.... 그런거지요?"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분노에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다.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어? 당분간 당신한텐 말 안하려했는데...."
" 거봐요 .내 말이 맞는거죠? 이 나쁜 넘, 정말 나쁜 넘이야 당신은...흑흑.."
" 미안해 여보! 오해하지마.사실은 그게 아니구....하청업하는 친구알지?
그 친구가 하두 부탁하길래 은행 대출 보증을 서줬는데 부도내고 행방을 감춰버렸어.
매달 은행 이자는 물론 원금까지 보증인이 상환해야하니......."
남편은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말 끝을 흐렸다.
" 네? 정말이예요? 액수가 얼만데요?"
" 미안해. 여보...오천만원이야.내 능력밖의 액수라 할 수 없이
가퇴직금타서 빚 갚을려구.... 정말 미안해.여보..........."
남편의 고개가 한없이 수그러졌다.
" 정말 그런거예요? 당신 믿어도되죠?"
그녀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훌쩍이며 무너지듯 안겨오는 남편을 안았다.
" 왜 혼자 걱정하구 그랬어요? 나한테 진작에 말해주지요.
그럼 당신이랑 같이 걱정했을 텐데요. 당신 혼자 걱정하는것보담 그래두 우리둘이
걱정하는게낫잖아요? 돈은... 좀 잃어버려두 괜찮아요. 또 벌 수 있잖아요?"

입술 꼬리에 애교점이 있는 슈퍼집 여자는 다음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명종 시계가 6시를 알리자 졸린눈을 부비며 일어나 전기밥솥 플러그를 꼽고
가게문을 열었다.아직 잠에 취해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깨우는것이 그녀의 다음일이다.
오늘도 가게문이 여닫힐 때마다 풀풀히 웃음을 날리며 우유 한 통 사러온
이층집 할머니의 웅얼거림에 미소로 답하고 수명 다된 보일러 교체해주지 않는
지독한 집주인 욕하느라 침방울 튕기는 뒷집 여자의 하소연도 들어주고
가게앞 빗자루로 쓸어내는김에 옆의 비디오가게 앞까지 쓸어주며
오후엔 때때로 꾸벅이며 졸면서 그렇게 하루를 고단함과 즐거움으로 가득히 채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