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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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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스<17>-못 말리는 쌍둥이 엄마


BY eheng 2001-03-31


우리 동네 쌍둥이 엄마가 있다. 그녀 역시 세상 못 말리는 열 불 난 몸부림스다.
시집가서 삼년이 지나도록 태기 없어 금식기도로 아일 가졌는데 기도발이 너무 셌던 탓인지 쌍둥이를 낳았다. 그것도 일란성 머슴아 쌍둥이다. 혼자서 키우기 너무 힘들어 친정 엄마와 합동으로 키우다가 그것이 족쇄 되어 아예 친정살이를 시작했다.
내가 쌍둥이 엄마를 처음 본 것은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지나서다. 물론 기억에도 삼삼한 오래 전의 일이다. 작은 아일 유치원 버스 태워보내고 집에 들어올라치면 아파트 화단 구석탱이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에 머리를 박고 있는 불량소녀가 있었다. 실핀 꼽은 짧은 머리, 청바지에 미키마우스 티셔츠를 입고서...

“쯧쯧... 학교엔 안 가고 저기서 뭘 한담? 요즘 애들이란...”

여러 날을 그렇게 보다가 어느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얼굴을 드는데 불량 소녀가 아니고 불량 아줌마였던 것이다.
우익! 아침부터 부탄가스 마신 얼굴이잖아?
그렇게 우린 만났다. 길거리서 만났다. 서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며 만났다. 그리고 쌍둥이 엄마라는 사실을 알곤 더욱 놀랐다. 그 후론 아이들이 동갑이란 사실을 알고 가깝게 지냈다. 둥글 납작 중국인형 같은 내 딸과 오뚝한 서양인형 같은 쌍둥이 아들 둘은 환상의 트리오였다. 못난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땡기며 잘도 놀았다. 그 당시 쌍둥이들의 주제가는
“얼굴이 예쁘다고 여잔가,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지...” 하는 노랠 내 딸 앞에서 개다리 춤을 추며 불러댔고 그 진의를 전혀 모르는 우리 못난이는 좋아라 손뼉을 치며 웃곤했다.

쌍둥이 엄마. 인상부터 쌈빡 그 자체다. 까맣고 반질거리는 피부는 혹시 전에 국가대표 육상선수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며 쫙 찢어져 놀라간 두 눈은 진정한 쌈꾼의 모습을 짐작케 했다. 화장은 전혀 안 하면서 아침마다 30분씩 하는 드라이발로 세운 머리는 뭔가 삶의 만만치 않은 자존심을 암시하곤 했다. 빳빳하게 다려 입은 셔츠와 칼같이 줄 세운 청바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나는 운동화는 그녀만의 청백리가 느껴졌다. 가끔 한치의 빈틈도 없는 그녀에게서 가슴에 달린 작은 앵두 브로치나 구슬 목걸이, 키티 고무줄 팔찌를 보면 갑자기 애들같은 정다움마저 느낀다.
그녀의 취미는 다림질이요, 특기는 남대문 일수 찍기다. 남대문과 동대문을 하루 걸러 한 번씩 커다란 배낭 메고 들려 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행동파 대원인 것이다. 그 배낭에 한 짐 실린 것들은 두벌씩 똑 같은 아이들 옷들과 가지나 호박 한 더미, 쇠꼬리, 중국 빵이나 만두, 혹은 부모님 드릴 옷가지들이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자기 옷도 하나.
쌍둥이 엄마의 본격적인 활동 무대는 교회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사는 쌍둥이 엄마는 새벽5시면 일어나 새벽 예배를 보고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밥하는 아줌마 여기 있었던 것이다. 수요 예배, 구역 예배, 금요 철야 예배에 주일학교 교사까지... 거의 교회에서 살며 그 은혜 넘쳐 동네방네 전도하고 다닌다. 어찌나 스케줄이 빡빡한지 한 번 면회하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알고 보면 쌍둥이 엄마 외로운 여자다.
쌍둥이 키우면서 골병 들고, 친정살이 하느라 눈치 병 들고, 남편 술 버릇에 화병 들고, 시댁에 미안하여 마음 병이 들어 아침마다 아파트 구석탱이에 나와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에서 천불이 난다며... 그 열기 식히려고 훅~훅~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콧김, 대단하다. 마치 이 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거북선의 화기만큼 거세고 뜨겁다. 그 콧김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전운마저 느꼈으니...

쌍둥이와 우리 못난이가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고, 잘 생긴 쌍둥이 학급 임원이 되었다. 그때나 이때나 학교 가서 선생님께 내 아이 잘 봐달라 아부성 발언 못하고, 부적절한 교사와의 관계를 원치 않았던 꿋꿋한 우리들은 학교엔 그림자도 얼씬 않했다. 근데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학교에서도 유명한 부정교사가 담임이 된 것이다.
학부형 몸부림스는 거의 다 알겠거니와 그런 부정교사는 촌지관행을 부추기고 받은 만큼 베푼다는 인과응보의 교육관으로 아이들의 동심을 짓밟고 있었는데... 콧김 세고 가슴에서 천불 나는 쌍둥이 엄마, 그 성격에 참고 있을 수만 없었다. 동네방네 같은 반 엄마들 소집하여 궐기를 했다.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순 없다. 보고 잇을 수만은 없다.
부정교사 추방하여 선진 교육 이룩하자!!!
내 애 네 애 가르지 말고 참된 교육 실현하자!!!
교사는 교육으로 승부하라, 촌지는 가라!!!
그리하야 용감무쌍, 안면몰수, 정의의 사도인 몸부림스 학부형이 거국적인 사건을 계획했다. 교장실로 가서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하고 교사를 문책해 달라고 하기로 했다. 처음엔 당장이라도 달려갈듯했던 학부형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못 가겠다는 연락이 오고...
심야에 쌍둥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 난 첨 들었다.

“못나니 엄마, 그만 둘까 봐요. 괜히 일만 커질 것 같아요. 겁도 나고...”

그때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나왔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넉넉한 뱃심에서 나온 것이 분명타! 쌍둥이 엄마에게 용기를 주자. 교회 엄청 다니는 쌍둥이 엄마를 꼬시는 건 역시 예수님 말씀.

“쌍둥이 엄마, 합시다.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힌 소인배들을 채찍으로 때리지 않으셨나요?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 징계하는 것도 하느님의 자식이 할 일이요. 피 흘리기까지 악과 싸우라고 성경에도 있잖우? 내 끝까지 같이 할 겁니다. 애들 전학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꿈틀 합시다.”

성경말씀에 다시 은혜 받은 쌍둥이 엄마, 다시 콧김을 날리며

“그럽시다. 죽기까지 대항합시다. 내일 갑시다.”
"할렐루야, 아멘."

결전의 날이 밝았다.
혹시나 알아볼까 봐서 안 쓰는 굵은 뿔테 안경 뒤집어 쓰고 머리 풀어 헤치고 교문 앞으로 갔다. 다들 하나같이 긴 버버리에 깃을 세우고,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무슨 제가 마타하리인양, 스파이들 접선하는 패션으로 나왔다. 서너 명 나올 줄 알았는데 고맙게도 예닐곱 명이나 나왔다. 역시 정의는 죽지 않았다. 엄마 몸부림스 용감하기 짝이 없다. 우리 정의의 부대는 곧장 교장실로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 간 문건을(그 역사적인 문건 누가 썼겠는가? 일필휘지 날리는 내가 밤새도록 썼다. 그때 그 버릇 아직까지 못 버리고 요즘도 밤세워 뭔가를 써야 직성이 풀린다.) 제출하며 교사퇴출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기로 맹세를 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 난감한 빛을 역력히 드러내며 조직의 힘을 무시하지 못하고 어쩔줄 몰라 횡설수설 하시더니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 또 약속을 했다.
승리다!!!
정의는 언젠간 승리하고 만다. 밝음은 어둠을 이기며 불의하고 부조리한 것들이 정의의 이름 아래 정죄 당한다는 사실을, 진리를 깨달았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거국적인 일을 치르고 더욱 막역해진 우리의 연대감을 또다시 찐하게 느꼈다. 어디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한 동료의식, 생사를 같이한 운명 공동체로서의 공감을 확인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이사 안 가도 되는 것이다. 그때 쌍둥이 엄마의 찐한 눈 빛, 참으로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결국 부정교사는 잘리지는 않고, 다른 학교로 전출을 당했다. 비록 다른 학교로 가는 걸로 미약하게 일이 무마되긴 했지만 그 사건은 아직까지 학교에서 신화가 되었다.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뭉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대항한다. 여럿이 뭉치면 된다. 학부형에게 큰 힘이 된 것이다.
몇 날 몇 일 그 일을 같이 도모하느라 밤 잠을 못 자며 얘기를 나누고, 부당함에 대해 화를 내며 서로를 독려했던 우리들.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같이 나눴던 우리들, 그렇게 쌍둥이 엄마와 못난이 엄마는 같이 몸부림을 쳤다.
우리만이 아니다. 같은 반도 아니면서 대자보 붙여 주겠다고 방방거린 원경이 엄마, 운동장에서 학부형들에게 공개 사과를 하게했어야 한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은지 엄마, 김밥통 들고 그냥 달려 가려 했던 김밥 집을 하던 준호 아빠,... 비록 같이 가진 않았지만 뒤에서 힘이 되 주고 응원을 해 주던 많은 학부형들... 그래서 우린 용기를 냈던 것이다.
그 후로 종종 한 밤 중에 살짝 나와 공원에서 만나 보온병에 뜨끈하게 끓여온 커피를 마시며, 소매 끝에서 캔 맥주를 꺼내고 주머니서 구운 오징어를 꺼내며 홀짝거리고, 컥컥대며 정발산에 오르고, 호수 공원을 걸으면서, 공원에 김밥 싸 가지고 아이들과 놀던 그 많은 날들...

그 쌍둥이 엄마가 이사를 간단다. 꽃피는 4월에 서울로 간단다.
배신자.
그렇게 배신을 때리며 간단다.
어릴 적 친구도 아니며, 학교 동창도 아니고, 같은 교횔 다니는 것도 아니다. 나이가 같은 것도 아니고 취미가 같은 것도 아니건만 그 누구보다 친했다.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 이웃 사촌이라더니 그 말이 바로 맞다. 가까운 데 살면서 친구처럼, 친척처럼 그렇게 지냈다. 고구마 삶으면 밥통째로 들고 오고, 나물거리 푸짐히 사면 반을 나눠주고...
자기 아닌 남들에게 너무나 헌신적이었던 쌍둥이 엄마. 친정 살아 우리보단 조금 여유가 있다며 단 한번도 밥값, 커피 값을 내게 하지 않았던 친정 언니 같던 쌍둥이 엄마, 우리 못난이를 며느리로 달라며 웃던 쌍둥이 엄마, 쌍둥이 둘 중에 누구에게 줄 지 너무나 고민되어 아직도 그 대답을 못 했건만 경기도의 힘을 무시하고 공기 나쁘고 인심 험한 서울로 이사를 간다니, 부정 교사도 없는데 웬 이사란 말인가...
믿겨지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쌍둥이 엄마 없는 이 동네, 날더러 어찌 살란 말인가? 이젠 이 일산을 누가 지키랴!
봄 되면 꽃구경 가자더니, 새로 생긴 식당에서 팍팍 끓인 청국장 먹자더니, 호수공원서 자장면 배달시켜 먹자더니, 길눈 어둔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을 자기집 드나들듯 다니더니, 온 동네 궂은 일 도맡아 하며 어려운 이웃 도와주길 자기 일처럼 하더니...
이젠 무슨 재미로 살 지 앞이 캄캄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길...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운 마음 더 커지는 반비례 측량법같이...
쌍둥이 엄마, 같은 하늘 아래서 몸부림치며 살다가 또 만납시다.
우리 한 번 찐하게 몸부림치며 삽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