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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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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가는 열차


BY 로미 2000-11-08


제가 전에 써 두었던 콩트 몇 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물론 실화는 아니고 전부 콩트이지요..



춘천가는 열차.


학교를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눈발이 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무 미련 없이 버스를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춘천으

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올 해 들어 첫 눈이었다. 첫 눈이 내리면 춘천가는 기차를 타

자,,고 약속했던 그는 없었지만, 나는 혼자 기차를 타고 약속을

지키러 떠났다. 춘천을 향해 갈수록 눈발은 더욱 탐스러워 졌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을 바라

보았다.

대성리를 지나고 있었다. 기찻길 옆에서도 보이는 민박집이 보였

다. 저어기..

저 멀리서 웃으며 그가 내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덜컹이며 기차가 다시 출발했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내 추억속

에 자리잡은 그 집을 오래 도록 바라보았다.

-여기 앉아도 되지요?

문득 눈을 들어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한 눈에

확 들어 올 만큼 잘 생긴 남자였다.

-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지만, 내색치 않고 여전히 창 밖

을 바라 보았다.

기타 가방을 둘러메고, 가죽 잠바위에 내려 맺힌 물방울들을 털

어내느라 잠시 부산했지만, 남자는 대체로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

었다.

-어디 가십니까?

-....

-춘천가세요?

-네에..

나는 모기보다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왜 가시나요?

-눈이 와서요...

차마, 눈이 내리면 같이 가기로 한 남자와 헤어졌다는 말은 하

고 싶지 않았다.

-혹시 애인하고 헤어지셨어요?

-아니요. 그냥 가는 거예요.

-저는, 사실은, 애인하고 헤어졌거든요.

-...

-얘기 해도 될까요?

-네..

-저, 지금 소양댐까지 가실 겁니까? 혹시?

-글쎄요..

-저하고 같이 댐 구경 안 가실래요?

-우리 모르는 사이예요.

-지금부터 알면 되지요.

이 남자, 여자 꼬시는 수법이 무궁무진, 다양하기도 하구나.

나는 쿡-하고 웃었다.

-왜 웃으세요?

-여자 친구 필요하세요?

-아니요, 지금은 사실 제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걸요.

-그런가요.

그는 맥주 캔을 두 개 사서 내게 하나 내밀고 자신도 벌컥 벌컥

마셔댔다.

-제 여자 친구는 제가 너무 잘생겨서 부담스러웠다지 뭡니까?

-???(뭐야, 자아도취에 빠진 놈인가?)

-잘난 척 한다고 생각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네...

-전 제가 그렇게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못생

긴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자친구가 부담스러워 할 만큼은 아

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제 여자친구는, 제가 너무 잘 생겨

서 부담스러웠다며, 글쎄 어느 날 정말 별 볼일 없는 놈하고 사

랑에 빠져버렸지 뭡니까? 저랑 언약식도 했었는데,,

너무 기가 막히더군요. 저보다 잘 난 놈이라면 제가 왜 이렇게

화가 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세상에는 참 별일도 많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

니, 분명 그는 장동건 만큼 생겼다. 나라도, 그렇게 잘 생긴 남

자가 애인이라면 항상 부담 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

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런 남자보다도 못한 놈이 나를 버리고 떠

나다니...

나보다 잘난 여자랑 만났다니...

누가 더 자존심 상해야 하는가? 머리 속이 복잡해져 왔다.

-그 쪽도 실연 당했나요?

-아니요!

나는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그렇다고 말한 것 보다 더 심하게

긍정한 셈이었다.

그는 씩 웃었다.

결국, 그와 나란히 소양댐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다들 우리를 흘낏거렸다. 사

실 나를 보는 게 아니라 그를 보는 거 같았다. 그리고 아마 이렇

게 수군 거리는 거 같았다.

-저 남자 너무 멋있지? 어머, 저 여자 땡 잡았다. 너무 아깝다,,

저 남자..


아, 여기 까지와서 이런 꼴이 되다니..


사람 별로 없는 소양댐에는 찬 바람만 씽씽 불어대고 있었다.

-여름에 여기 왔었죠.

-전 처음이예요.

그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하나 빼더니 힘껏 멀리 그 반지를 던졌

다.

-아깝다...버릴라면 차라리 쓰레기통에 넣지..내가 줏어라도 가

게...

어이 없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후련하세요?

-네. 이제 잊을 껍니다.

코끝이 얼얼해서 콧물이 다 흘러 나왔다.

-내려 가죠..

-그러죠...

그런다고 뭐가 후련해 졌겠는지..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만 헤어지죠.

나는 시내 한 복판에서 그에게 말했다.

-점심이나 같이 먹지요.

-싫어요.

-제 길에 동행이 되어 주셔서 감사한데 제가 한 턱 쓸게요.

-괜찮아요. 어차피 어디 가려고 마음 먹었던 건 아니었어요. 단

지 춘천가는 기차를 타는 것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택시를 타고 공지천으로 가 주세

요..라고 말했다.


그가 내 후배와 눈이 맞아 공지천에 카페에 갔었다는 것을 우연

히 본 친구가 전해줬었다.

그는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게 나를 더 화나게 했었고, 니보다

이쁘고 잘난 후배 또한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 걸 내게 확인시

켜 준 셈이었다.

-흥,,별로 좋지도 않은 이런 델..

우리 둘이 오자고 했던 약속의 장소를 나는 거닐어 봤다. 이제

돌아가면 너보다 더 잘난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말겠다. 너 같

은 놈 쯤 잊어 주겠다. 나는 괜찮아.차라리 잘 되었지.내가 복

이 많은 거야...

찬바람이 씽씽부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에 서서 나는 미친년처

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시 기차역에 도착 했을때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감기 들고 지친 상태였다.

역 앞에 카페에 들어가 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자니.문득 쓸쓸하

고 허무하고 처량 맞았다.

-다음에 춘천 오면 절대로 이런 꼴로는 오지 않을 꺼야..

나는 내게 다짐했다.

-어, 아직 여기 계셨군요!

반갑게 아는 체를 하는 한 사람, 낮에 만났던 그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나는 말했다.

-예. 그 쪽도 아직 계셨군요.

그와 마주 앉아서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돌아갈 차 시간을 세고

있었다.

-서울 가면 우리 한 번 만날까요? 이것도 인연인데...

-아니요. 우연히 한 번 더 마주친다면 그때요..

-그럴까요?

-인연이 있다면요...

우리는 사이 좋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삐거덕 문이 열렸다.

나를 배신하고 떠났던 그와 후배였다.

-엇?

-어머,언니...


순간 사태를 직감으로 파악 한 듯한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

다.

-누구?

-응, 내 친구랑 후배..

-어, 안녕하세요?

저보다 열 배쯤 잘 생기고 키 크고 분위기 있는 그 사람에게 당

장 주눅이 든 나를 배신한 그 넘,홀린 듯 바라보는 후배의 표정,

그 표정들을 보고 나는 고소해서 미치고 싶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갑니다!

-안녕!!


카페를 나와 기차를 타러 가는 동안 내내 그는 어깨를 풀지 않았

다.

기차를 타고 나서 그는 내게 물어왔다.

-무지 고맙죠?

-무지 무지 하게요...

-서울 가면 한 턱 쓰세요.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요...

-네...그럴께요.



그는 처음처럼 대성리에서 내렸다.

나는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연히,

나는 오늘도 우연히 그를 마주치면 한턱 단단히 쓰려고 벼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