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이나 날씨가 쌀쌀해졌다.
며칠 있으면 엄마의 기일이 돌아온다.
그러나 별다른 일이 있는것도 아니다.
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다음해에 엄마와 아버지의 제사를
합쳐버렸기 때문에 형제 자매들이 모일 일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까지 엄마의 제사는 가족이 모이는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나와 내 동생은.
엄마는 내가 5살 동생이 3살 되던해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다닐때에 수학여행이라고 가면 꼭 촛불 밝히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엄마를 큰 소리로 부르라고 한적이 많았다.
난 그시간을 무척이나 싫어 하였다.
부를 수 있는 엄마도 없거니와 너무도 일찍 가신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생과 사를 본인의 의사대로 할 수 없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난 첫 아이를 가지고도 태담이란건 잘 할 수가 없었고,
아이가 울어도 "아가야 엄마다 엄마야"라고 엄마라는 말을
사용해서 얼르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 했다.
그만큼 나는 엄마라는 말을 사용한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일찍가신 세월 만큼이나 아버진 오랜동안을
혼자 사셔야만 했었다.
너무도 건강하셨던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6개월을
나의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셨다.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 하셨던 아버지는 남편이 결혼만 하면
장인에게 잘 하겠다는 그약속을 지키게 해 주셨다.
그리고 남편과 제일 말이 잘 통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아버진 엄마 대신에 많은것들을 해 주셨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그립기만 하다.
예쁜 꽃을 볼때도 방안에 꽃을 꽂아 놓으시던 아버지가 그립고
음식점에서 가족이랑 외식을 할때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외식을 시켜주시던 그때가 생각나 그립다.
텔레비젼에서 혹여 병명이 '암'이라고만 해도 아버지의 그 고통
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 눈물짓게 된다.
아버진 화장해 주길 원했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너무도 좋아하시던 산 아래에 묻히셨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뒤 아버지가 계셨던 방에 몇날 몇일을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부르실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지만 이 딸의 가슴속에 계시다고 말하러
아버지께 가야겠다.
엄마는 만났냐고 그리고 이젠 외롭지 않으시냐고 물어봐야겠다.
아버지가 너무 너무 그리워 눈물이 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