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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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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BY 남상순 2000-05-07


나는 생모에 대한 기억이 단 두개 있다. 엄마가 있던 건너 방에 갈려고 했을 때 여러 번 제지 당하였고, 간신히 엄마 방에 들어 갔을 때 누운 채로 사정없이 나를 발로 차던 무서운 엄마의 기억이다. 질려버린 나는 서러워 울며 그 방을 나오고 말았다. 막연한 기억이지만 그 뒤로 나는 엄마 방에 가지 못했고 종종 원망스레 그 방 쪽이 궁금했으나 다시는 들어 갈 용기를 내기 못했다.

또 다른 기억은 여러 날 후 가마니에 무언지 둘둘 말아 앞 마당을 지나 뒷동산 쪽으로 갔는데...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금방 그것이 엄마의 시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엄마가 죽었다.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엄마처럼 발길로 차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온 가족의 침통한 분위기며 한 두어명 머슴들이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는 건너 방에 대한 나의 미련은 깨끗이 사라졌고 나쁜 엄마에 대한 기억은 한동안 내 가슴 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얼마 후 한밤중 큰 삼촌이 온양서 아산 외가로 왔고 할머니한테 가자고 했는데, 왜 그 밤에 가야만 하는건지, 캄캄한 밤 바람이 후지근 했던 기억과 무등을 탔다가, 걸었다가, 업혔다가, 새닥거리며 삼촌과 백사포 길을 많이 많이 갔을 때 외가와 비슷한 산 동네에 새벽녘에 이르렀고 제일 먼저 마중 나온 할머니가 통곡을 하셨다.

왜 그렇게 할머니가 흐느씨시는지, 어리둥절 했으나 곧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고모, 그리고 친척들, 그런데 간 밤에 나랑 그토록 재미있게 밤 길을 걷던 삼촌은 그 날 이후 도무지 찾아도 보이지를 않았다.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노끈을 꼬시던 꼬부라진 다른 할아버지 (종조부)외엔 온 집안은 여자들 뿐이었다.

엄마에 대한 추억들이 내게 많이 들려졌는데 종일 말이 없던 정숙 한 여인, 양반가문의 망내 딸로 독선생을 두고 공부한 영특한 여인, 각가지 악기를 다루셨던 서예를 잘 하시던 여인, 아버지랑 바둑을 두던 멋스러운 여인이라든 등등의 이야기들이었다. 종종 \\'에미 절반만 닮어두!\\'라는 말을 듣고 자란 나는 오히려 내 마음 깊은 곳에 쌀쌀하고 매정한 나쁜 여자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나를 발로 차 밀어내던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한 후 엄마가 페결핵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에 대한 나쁜 기억은 뿌리가 뽑혔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었다.

50년전 폐결핵이란 오늘날 에이즈만큼이나 나쁜 병이었다. 유대인에겐 부정한 문둥병자 정도의 느낌이었을 까? 폐병환자가 발생하면 곧 그 집은 흉가가 되고 말았다. 전염이 심한 속수무책의 병이었기 때문이다. 격리를 요하므로 수치감까지 동반했던걸로 안다.

6.25전쟁중에 어찌 치료를 할 수 있었으랴! 폐병말기 환자인 엄마는 보채는 달이 얼마나 품에 안아보고 싶었을까? 그러나 전염을 걱정한 엄마는 정이 뚝 떨어지게 따돌리는 것 이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는 최선이었으리라.

슬픈 모정이여! 전쟁이 발발, 엄마는 병든 몸으로 친정에 돌아와 건너방에서 겨우 한달 남짓 투병하다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경황없는 때라서 뒷동산에 간단히 묻힌 것이다.

남편도 없이 6살짜리(만4년 9개월)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마니에 둘둘 말아 그렇게! 씨앗 하나를 남겨두고...

도망다니던 삼촌이 가까스로 한 밤중 몰래 나를 업어다 친가로 데려다 놓은 후 숨어다니고. 한국전쟁 만큼이나 내 인생의 험란한 굴절이 깊어만 갔다. 엄마가 심어 준 매정한 사랑이 자생력으로 내겐 유산되었고 해방동이로 태어나 전쟁세대의 수난을 살아남는 미천이 될 줄이야, 여인은 갔고 나는 여기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