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젊은이들에게 회자되었던 ‘존버정신’.
젊은이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며 무조건 버티기만 하면 생존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주었던 ‘존버정신’의 신화는 이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공감되었다.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버텨야 한다고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코피터지고 등골빠지는 한이있어도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했다. 오죽하며 그 힘듦의 대명사 ‘존’이라는 단어가 탄생했을까.
기다림도 미덕이고 버팀도 미덕인 시대다. 남아있은 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것은 기다림과 버팀이었다. 과거의 인내와 동일하다.
‘고진감래’라고, 언젠가는 희망이 오고 그 희망이 희망으로 연결되지 않았는가. 지금은 모두 '노‘라고 말한다. 힘겹고 사투를 벌이고 살아남았을지언정 몸과마음은 망친창이가 된채, 그러하더라도 ’희망없음‘이다. 모든 것을 사회와 기업탓으로 돌린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고단한 인생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스스로 안위하기도한다. 정말 우리는 희망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걸까. 젊은 세대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까. 잠시 뒤돌아만봐도 아득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살고있는 아이들의 미래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래를 누가 책임질까. 그들은 스스로도 짐을 지려하지 않는다.
너나 없이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하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살아가고
어떻게든 어디서든 살아진다.
그동안 나역시 존버정신에 합류하여 급물살을 탔다.
사무실을 나와서 한일이라곤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곱씹는 행위였다. 그 중심에 남편이 있었음은 두말할나위 없다. 일방적인 대항과 절규는 남편 퇴근시간에 맞춰 상사를 맞이하는 고통과 충돌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내라고 남편이 나를 특별한 대우를 하기는커녕 그저 편하고 만만한 아내를 마음껏 휘두른 보복행위이자 정당방위라 위안했다.
그 과정 없이 남편에게 억눌리며 직장 상사로 모든걸 받아낸 회한을 삭이는건 불가피했다. 그가 내 남편이 아니라면 난 그럴 이유를 찾지 못했을거란 결론을 내리니 조금은 위한이된다.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고 내가 그렇게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사무실 이직 기간은 2년이 고비이고 5년을 못채우고 대부분 힘겹게 회사를 떠난다고한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일을 해도 사장과 직원의 벽,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현실과위 괴리 몸도 마음도 녹아내릴만큼 지친 전쟁터에서 탈출하는건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다.
그런면에서 평생 직장을 다니고 한 회사에서 정년을 맞는 남성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된다. 남편 역시 앞으로 계속 회사를 운영해 나가겠지만 남들처럼 정년을 바라보는, 아니 그이상 일하기를 바라는 나는 이기적인 아내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