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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에 감사할 밖에.


BY 한이안 2013-09-05

논산으로 둥지를 옮기고 나서 병원도 옮겼다. 보령에서 마지막 받아온 두 개의 인슐린으로 난 한 달 반가량을 버텼다. 병원을 찾을 때쯤은 맞는 양이 처음 30단위에서 8단위로 줄어 있었다.

혈당을 낮추기 위해 난 공설운동장 부설 체력단련실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근육이 있어야 했다. 내 몸엔 근육은 붙어있는 곳이 없었다. 몸무게가 어느 정도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게 근육일 리는 없었다. 근육이 인슐린으로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근력운동을 40여 분 하고 러닝머신에서 걷기를 20여분씩 했다. 오고가는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2시간을 난 운동에 쏟아 부었다. 그래 그런지 혈당도 잡혀갔다.

논산에서 새로 만난 의사는 8단위 정도면 약으로 해결이 되는 수치라며 약을 처방해줬다. 그날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던지! 내 배에 바늘을 꽂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데 며칠이 지나면서 위가 불편했다. 위가 아프다는 내 말에 의사는 위장약을 함께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싫다 했다.

내 몸이 탈나기 전까지만 해도 약이란 입에 대지도 않고 살았다. 위장약도 마찬가지였다. 약은 늘 내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보험료가 아까울 정도였다. 한데 약으로 달래란다. 난 처방전만 받아들고 나와야 했다.

한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픔은 가시지 않고 점점 더해갔다. 운동을 거르지 않고 하고 있었음에도 나아지지가 않았다. 명치끝이 아파서 자다가 깨어나기를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약은 아침저녁 반 알씩 올려 하루 한 알을 더 먹고 있었음에도 혈당은 그대로였다. 통증만 점점 심해져갈 뿐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통증이 명치끝에서 시작되어 아래로 쑥 훑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난 배를 움켜쥐고 참아야 했다.

더 약을 먹을 수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물론 형제들은 내가 약을 먹고 있는 걸로 알았다. 난 그렇게 말했고, 내 몸이 힘들어도 형제들 앞에서는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몸도 마르긴 했지만 37Kg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난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돼지고기 살코기를 사다 매일 100g정도를 먹었다. 운동량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근육만 붙고 살만 좀 오르면! 그러면 당뇨 너와의 싸움은 끝이야. 내 바람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바람으로 끝나고 비켜갈 때가 많다. 난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어댔다. 아몬드 1Kg을 볶아놓으면 7일 만에 바닥이 났다. 그래도 버텨낸 게 아몬드 덕이었을까? GI지수는 낮으면서 칼로리가 높은 아몬드가 소변으로 빠져나간 탄수화물을 대신해 몸을 지탱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10Kg 주문한 게 겨우 서너 달 만에 동이 났다. 난 다시 주문할까 하다 미적대며 미루었다. 대신 고기로 생각을 돌렸다. 그 생각의 밑바닥엔 근육을 만들기에는 돼지고기 살코기와 오리고기가 아몬드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난 돼지고기 살코기 아니면 오리고기를 사다 끼니마다 챙겨먹었다. 대신 탄수화물덩어리인 밥은 양을 그만큼 줄였다.

한데 고깃덩어리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래 위에 대리석을 얹은 꼴이었다. 기초가 허술하니 아무리 좋은 것도 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했다.

점점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화장실을 드나드는 게 다시 잦아졌다. 그래도 난 운동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운동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제 구실을 못했다. 제 구실을 하려면 양분이 탄탄하게 밑을 받쳐줘야 했다. 한데 내 몸은 양분을 밀어내기 바빴다. 그래도 난 믿을 건 그거밖에 없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내린 눈이 얼어붙어 길이 맨질맨질한 날에도 난 밖으로 나섰다.

20131월 어느 날, 난 눈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걷고 있었다. 체력단련실로 가기 위해서였다. 다리 힘이 빠져가면서 난 다시 이승과 저승의 중간을 떠돌고 있었다. 제일 먼저 현실이 멀어졌다.

눈길을 걷고 있는데 꼭 이방인 같았다. 먼 과거, 아니면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 같았다. 기분이 그랬다. 그러면서 난 그 길을 걸어갔을 백 년 전 혹은 천 년 전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 생각은 허무함을 꼬리에 매달고 왔다. 그들이 모두 어디 갔을까? 더 이상 존재하지도, 존재한 흔적도 없는 그들이었다.

나도 그렇겠지. 내가 흔적도 없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먼 미래의 사람이 20131월 어느 날 눈길을 걸어간 나를 떠올리기나 할까? 마음이 쓸쓸하고 허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쓸쓸함과는 달리 생각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실마리가 되어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 태어났으니까. 그러니 아파도 살아있음에 감사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