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자신의 어린시절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것도 한참 어린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이전의 그 시대,
내가 기억하고 있는것은 초등학교 1학년시절 그때가 장마철인지 몰라도 한참동안
비가 세차게 내리고 1학년이였던 나는 잠깐 밖에 나가서 소변을 눌때 그만,
손톱 하나가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나의 성장통은 진행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하고 아이들하고
몇 명이서 반 친구 집으로 가정방문 갔었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두분이 계시는데 첫번째는 할머니 두번째는 둘째 고모부,
어느날 나는 울산의 한 아파트에서 기찻길을 보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여행을 좋아하는분이라
그런지 장손인 나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70년대 그 시절 아파트에 살면 부자였던것 같은데
들리는 말로는 할머니 본가는 부자였던것 같다.
일찍 할머니 따라서 여행가는것을 좋아했기에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나 혼자 시골가는것이 좋았고 혼자 터미날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간다.
그렇게 할머니는 어린 나를 이 험한 세상에 혼자 살아갈만큼의 인생이라는 교육을
말씀 한번하지 않고 눈으로 보게하고 귀로 듣게 하는 그리고 입으로 말하게하는
주입식 교육이 아닌 아이 스스로 깨우치게 했었다.
그리고 두번째 나에게 영향을 주신분이라면 둘째 고모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고모부는 시골출신 고모하고 같이 결혼을 하셨는데 사람이 참 좋다.
언제봐도 넉넉하고 인자하신 고모부는 어린시절 항상 우리집에 오시면 그 시절 귀하다던
과자선물세트를 가져오셨는데 나는 동생들하고 과자를 나누면서 행복했었다.
항상 고모부는 인자한 웃음으로 보여주셨는데 내가 성장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고모집에 갈때 그시절을 잊지못해서 호떡을 가져간다.
물론 사촌들하고 같이 나눠 먹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내가 한참 어려웠던 20대 중반시절,
몸이 좋지 않기에 대구쪽으로 올라가서 죽을 끊여먹으면서 혼자 살아갈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고모부였기에 편지를 보냈다.
항상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것 같은 생각에 사실 너무 그리웠다.
2년동안 있다가 내려오면서 어느날 고모집에 갔는데 우연히 대구에서 내가 보낸 편지가
보이기에 다시 읽어보는데 웬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왔다.
나는 요즘도 친구 집에 간다면 빈손이 아닌 한 손에 과자를 가져가는데 물론 고모부의
그 영향인데 고모부는 어린 나에게 넌 나중에 자라면 어떤식으로 베풀어야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고모부의 행동을 나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스스로 알아갔다.
아버지는 고모들이 이사갈때 오빠로써 한번쯤 가볼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런면에서는
문외한이였기에 아들인 내가 혼자 선물을 가지고 간다.
웬지 그것이 나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작은 생각으로 이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넌 인생을 어떤식으로 살아라는 가르침을 주시지는 않았다 사실,
인생이란 자신 스스로 알아서 헤처나가야 한다는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나는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어떤식으로 잘 마춰나가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