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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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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부찌게


BY 라니 2010-12-24

순두부찌개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 에서는 두부를 직접 만들어 먹었는데 특히 명절엔 꼭 콩을 한말씩 물에 불려 엄마랑 둘이서 하루 종일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었습니다.

간 콩 국물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에 끓여서 그 뜨거운 콩물을 삼베자루에 넣고 기다란 나무주걱으로 자루 옆구리를 꾹꾹 누르며 콩 국물을 짜낼 땐 정말 이지 그 뜨거움과 아궁이에서 나올라오는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 질질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콩을 갈던 맷돌을 올려 눌러주어야 하는 시간이 걸리는 두부보다 그 전에 아버지 드리라고 한바가지 떠서 주시는 순두부 한 그릇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의 유혹과 대가족살림을 하시는 어머니의 노고를 그냥 넘기지 못해 항상 두부 만드는 걸 도왔던 것 같습니다.

끓여 놓은 콩물에 간수를 조심스럽게 넣으면 장마철 오랜만에 하늘이 나오고 하얀 구름들이 뭉쳐 다니듯 몽글몽글 뭉쳐지는 모습이 마치 깍아 놓은 양털 같은 순두부!

박 바가지로 한바가지 떠서 파 총총 썰어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 듬뿍 넣어 만든 양념간장 살짝 뿌려 한 숟가락 떠서 먹으면 양념간장 맛이 혀에 느껴짐과 동시에 고소하고 부드럽게 입 안 가득 흩어지는 순두부의 달콤한 맛

그런데 그때까지 알던 순두부와는 너무도 다른 빨간 국물의 순두부를 서울에 사는 오빠를 만나러 와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당혹스러움과 새로움을 지금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던 내가 서울에 올라와 용산역에서 오빠를 만났는데 그때 오빠는 외삼촌댁에 얹혀살고 있던 터라 외삼촌 집에가 밥 이야기하기가 곤란했던지 터미널 앞에서 밥을 먹고 가자고 하더군요.

오빠가 순두부를 권했고 난 내가 알던 그 순두부를 떠올리며 그러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음식이 나오고 난 깜짝 놀랐습니다. 빠글빠글 맛있는 소리와는 다르게 시뻘건 국물이 한 층을 덥고 있는 음식을 보니 속이 멀미하듯 울렁였습니다.. 그 도 그럴 것 이 그때 편식이 아주 심해서 모든 음식에 기름이 뜨면 먹지 못하던 나는 설날 떡국도 멸치국물에 따로 끓여 다른 사람 국그릇에 떠있는 기름방울을 보는 것도 힘들어 부엌에서 혼자 먹기도 하였거든요.

그런데 감히 숟가락을 넣어볼 엄두도 못 내게 고추기름 잔뜩 뭉쳐져 일렁이는 순두부찌개라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때 오빠가 "먹어봐. 맛있어 "

"응" 마지못해 대답은 했는데 마음속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이 순두부찌개만큼 끓고 있었습니다..

오빠가 처음으로 사주는 밥인데 못 먹는다고 할 수도 없고 외삼촌댁에 가서 외숙모께 밥 달라고 할 만한 숫기도 없어 그냥 먹어보기로 맘먹었다.

설마 "죽기야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한 숟가락 떠서 후 불고 입에 넣으니 보기에 느글거리던 빨간 기름국물이 보기와는 다르게 얼큰하고 시원하고 개운하게 목젖을 따갑게 타고 넘어갔다

거기에 계란노른자 동동 이던 걸 오빠가 휙휙 저어주니 한결 부드러워지면서 국물이 톱톱하다는 평소 엄마의 표현처럼 되었다. 간간이 숟가락에 걸려오는 바지락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언제부턴가 식당에 가서 뭐 먹을까 고민이 될 때 거의 대부분 순두부찌개를 시킵니다.

그리고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기대하던 날에 찬바람 스산하고 하늘이 낮아지는 때면 빨간 고추기름이 일렁이며 짜글짜글 짜글거리는 순두부찌개가 생각납니다. 뚝배기 가에로 퐁퐁 튀어 오르는 국물에서 추운겨울 언 손을 녹여주는 입김 같은 오빠가 다 표현 못한 따스한 기운을 헤아려봅니다.

객지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동생에게 집 밥을 먹여줄 수 없는 형편과 마땅히 어디로 안내하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자신의 모습이 자칫 초라하여 동생이 맘 아플까 조심스러우면서도 잘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여건 등등 그때 오빠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였을 거라 이제야 짐작이 됩니다.

작은 뚝배기 안에 바지락 순두부, 호박, 버섯 파, 등등을 넣고 바글바글 자글자글 끌인 다음 마지막에 살짝 올려놓는 한 개의 계란까지...조만간 맛있는 순두부를 바글바글 끓여놓고 오빠를 초대해 그때 오빠가 사준 순두부가 지금껏 내가 먹어본 순두부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이젠 말하고 싶습니다.

양념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엄마순두부와 빨간 고추기름 넉넉히 들어간 얼큰하고 시원한 빨간 순두부찌개에선 항상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마음 따스해지는 오빠의 향기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