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엔? 제트기 탄 놈이 있다.
어릴 때 윙~ 소리나는 하늘을 보면
어느새 하얀 연기 줄꼬리만 남기고 저만치 사라진 제트기가 있었다.
그 제트기가 뜨면 전쟁난다는 큰 아이들 말에 나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오늘 오후, 금요일은 평소보다 손님이 좀 늦게 끊긴다.
컴퓨터 접속, 예천님의 '빨간 왕좌'를 열어
큭큭 웃으며 글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밖에선 남편이 어느 남자와 조용조용하면서도 웃음 섞인 대화를 나누는데
좀 길어지는 듯 싶다.
문 틈으로 슬쩍 보니 손님의 모습 반쪽만 보인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 겹쳐 입은 때 늦은 겨울 점퍼....
뭐 이 나라에선 충분히 개성있는 ‘터프’한 모습이다.
다시 글속으로 빠져 들 자세를 갖추는 순간 남편이 급히 부른다.
"애기야~ 일루 나와 봐~”
왜 또!! 나 아컴 들어간 거 방해할려구 그러지?
“아니야… 진짜 웃겨…”
무슨 일인데?
그의 앞에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콜라가 놓여 있고
손엔 막 무언가 자르려고 한 듯, 컷팅 칼날이 길게 뽑혀 있다.
“방금 그 남자 …… 동전 묶음 세 개를 들고 와서 콜라 한 병을 사고 동전을 지폐로 바꿔 달래……”
그래서?
그러니까 한화 1만원인 동전 묶음 세 개를 들고 와서
콜라 한 병을 사고 동전 묶음을 지폐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고
남루한 차림이 좀 미심쩍은 남편이 동전 묶음을 살펴보니
은행서 막 나온 듯 포장되어 있었지만, 동전이 보이는 윗면 반대편은 풀로 붙어 있어
내용물을 확인 할 겸 칼로 종이를 자르려는 순간 남자가 동전묶음을 나꿔채 갔다는 것.
그의 예상대로 동전 묶음 윗 부분만 돈을 올려 실제 내용물은 비슷한 크기의 양철이나
화폐가치가 없는 이상한 나라의 못 쓰는 돈들이든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순식간에 동전을 빼앗긴 그는 칼날을 미처 넣지도 못한 상태였던 것.
남루한 행색, 큰 돈도 아니고 기껏 3만원....
얼마나 돈이 필요했으면 그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냉장고와 실내 온도차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카운터 위에 올려 져 있는 콜라를 보며
'짜식! 나는 놈 위에 제트기 탄 한국 사람을 몰라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다시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당하지 않았다는 기쁨도 잠시, 서서히 마음 한 구석이 짠해 지기 시작한다.
“자기, 콜라는 그냥 가져가서 마시라고 하지 그랬어…”
하긴, 그런 말을 할 짬조차 없긴 했다.
“야, 진짜 우리가 바본 줄 아나 봐…”
개업하고 2개월만에 고액권 위조지폐 세 번을 받아
본전 생각보다, 속았다는 사실에 더 분하고 기분 나쁘던 경험...
나쁜 경험도 그리 나쁜 것 만은 아닌 듯 하다.
세상물정 모르던 순진무구한 선생을 이렇게 세상사람 만들어 놓은 걸 보면 ㅎㅎ
생전 그런 경험 해 본 일 없는 남편으로선 마치 강도를 만난듯 황당하고 기막힌 표정이었지만
산전수전공중전수중전멀티미디어전까지 겪은 나는 그래봤자 3만원인데
하는 생각을 밀어내며 복잡한 생각이 교차한다.
그런 머리 쓸 시간에 시간당 10불짜리 막노동을 하면
콜라 100병도 사먹을 수 있을텐데…
그 생각조차 하지 못할 사람이니 인생 그렇게 허비하며 사는 것일 테지만
괜히 남의 마음만 언짢게 해 놓고 갔다.
“다음엔 그런 사람 오면, 모른 척 돈 줘 버려”
“왜? 지들끼리 정보를 교환해서 우리 가게를 밥으로 알텐데?”
“그 돈이 그 남자 오늘 하루 끼니 값이었을 지 모르잖아”
“차라리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주지…”
에잇! 정신 멀쩡해 가지고 일하기 싫으면 굶어! 굶어! 뒷통수에 대고
소금 한 바가지 뿌리고 싶은 미움과
혹시 하루 종일 굶고 온 사람은 아니었을까…
부득부득 쓸데 없는 걱정이 이 밤까지 따라다닌다.
그리고 누군가 그에게 알면서도 속아 주는 아량으로
이 밤까지 굶고 있지 않기를 ….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