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자유였다
참으로 오랜만의 자유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공간에서의 자유. 아무 것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족한 자유. 그래서 결과에 대해서 가타부타(可타不타)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게 내게도 가능하다는 말이지. 뭐, 그동안 딱히 마음먹고 남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었으니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만, 작은 내 체구에는 너무나 힘든 세월이긴 했지.
오늘 영감이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동창회엘 나갔다. 병을 얻은 뒤로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동창회엘 나가지 않았다. 중고등학교의 동창회보다도, 대학의 동창회보다도 유난히 애착을 갖던 초등학교 동창회. 십여 년 이나 동창회장도 맡아 열성을 부리더니, 한동안은 심드렁했었다. 그러더니 어제는 이발도 하고 옷을 고르고 분주하더니, 드디어 아침에 집을 나섰다.
“다녀오세여~!”를 외치고는 거실에 큰 댓자(大字)로 누웠다. 거실의 천장이 이렇게 높았었나 싶다. 누구를 불러 노닥거릴 것도 없고, 그냥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자 마음먹는다. 누운 채 두 팔과 두 다리를 저으며 어린아이가 되어본다. 이쪽 거실 벽에서 맞은편의 벽까지도 굴러 본다. 착실하게도 청소기를 돌리던 영감도 오늘은 아니었다. 뭐, 그쯤은 봐 줘야지. 크크크.
햇살이 좋은 마당의 꽃잔디가 오늘따라 그 빛이 유난히도 곱다. 어~라. 노랑나비 한 쌍이 나풀거리며 다가온다. 사실 꽃잔디 향기가 유난스럽걸랑. 저들도 커플이겠다. 하하하. 햇빛도 오늘은 유난스럽다. 머리 위에서 ‘쨍~.’하고 사방팔방으로 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세돌이(푸들강아지)도 오랜만의 사모님(?)의 여유로움에 신이 난 모양이다. 뱅뱅 내 주위를 돈다.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영감의 화원’에 물은 좀 먹여야겠다. 긴 호수를 풀어서 시원하게 화분의 꽃에 물을 먹인다. 나도 목이 타네?!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프구먼. 벽시계가 벌써 1시를 넘는다. 음~. 그렇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겠다?! 자유도 좋지만 밥은 먹어 둬야지. 오랜만에 나만을 위한 성찬을 차려 봐봐?
에~라. 쉽게 먹자. 이왕에 얻은 자유가 아닌가. 간이도마에 빨갛고 노란 피망을 잘라놓는다. 누가 봐 주는 이들도 없으니 도마 위에 놓인 채 그대로 먹자. 뭐, 어떨라구. 양배추도 통에 넣어 둔대로 냉장고에서 꺼내놓는다. 누가 뭐랄 사람이 있냐구. 쌈장도 손질해서 병에 보관한 그대로 내놓자. 살짝 옆구리에서만 찍어먹으면 되잖아 히히히.
주섬주섬 여러 가지를 벌려놓을 필요가 없다. 현미밥 한 숟가락에 뭐, 여러 가지 반찬이 필요치 않다. 이만하면 나만의 성찬(盛饌)으로는 훌륭한 걸. 아구아구 퍼 먹고 나니 설거지도 수월타. 이 아니 좋을시고. 눈에 좋지 않다 하여 마시지 않던 커피를, 오늘은 우아하게 한 잔 넘기고 싶구먼. 뭐, 한 잔쯤이야 어떨라구. 이왕이면 며느님이 좋아하던 영국산 머그 잔을 채우자.
햇볕이 내리쬐는 베란다의 티 탁자에 앉아서 그윽한 커피의 향을 음미한다. 비록 ‘믹서커피’이긴 하지만(나는 ‘믹서커피’를 제일 좋아한다^^). 아주 바쁘게 살 때에도 ‘커피타임’만은 여유를 부리지 않았던가. 비록 밥을 먹을 때에는 들고 다니며 먹더라도, 커피는 자리를 잡고 폼(form)나게 마셨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 짓(?)도 해 본다. 역시 믹서커피가 최고야.
시간은 참 잘도 간다. 딩굴며 보낸 시간이 7시를 가르킨다. 방에서는 전기를 켜야 할 시간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영감은 언제 온다는 소리도 없었네?! 저녁은 어째?! 전화를 걸어 봐봐? 영감의 할마이동창들한테, ‘누구는 영감이 없냐!’고 한 소리 듣겠지. 그런데 이 영감은 전화도 못해? 밖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말이지. 겁 많은 마누라인 줄 알면서.
방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걸어 잠근다. 평소에도 문단속을 잘하는 나지만, 오늘은 더 그래야한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건, 아마 ‘세돌이’겠지. 아니 바람인가? 오늘은 바람이 센 겨? 그런데 이 영감은 왜 안 돌아와? 김을 재며, 자꾸만 ‘세돌이’가 두드리는 현관을 바라본다. 아, 나는 아직 혼자 이기에는 어린가(?) 보다 ㅋ~. 나만의 자유. 12시간의 자유는 이렇게 끝을 보인다.
나만의 성찬입니다 ㅎㅎㅎ. 꽃잔디에 물을 주다가 날아온 나비를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