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이 할매는 못 말려
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좀이 쑤셨다. 이제는 봄인가 싶어서 셔터를 열면 으스스 한기가 돌아 다시 철수. 그러기를 여러 차례. 사실은 지금도 해가 너머 가면 을시년스럽긴 하다. 그러니까 해가 지나기 전에, 빠른 동작으로 늘어놓았던 것들 접고 후다닥 튀어야 한다.
뉘라 불러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붙잡아 앉혀놓은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내려오려고 기회만 노리는 건 어인 징조람. 왜 아니 그렇겠어. 이제는 허허스러운 영감만 하루 죙일 바라보며 무슨 재미가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옛날처럼 고운 구석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날이 그날이기를 자그만치 6개월. 이건 나만의 기호는 아닐 게다. 영감도 그랬겠다. 애시당초 이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옛날엔 풋풋한 정(情)이라도 있었던 마누라였겠지. 시선을 둘라치면 도끼눈을 하고 길게만 앉으려는 마누라가 뭐 그리 애틋했겠느냐구. 쩍~하면 입맛이지.
마당으로 내려서니 햇살은 좋은데 바람이 싫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셔터를 올리니 오~라. 그래도 반기는 이들이 많다. 눈웃음도 새삼 즐겁고 손이라도 흔들며 지나면 더욱 고마운지고. 앞댁의 아주머니도, 비껴 옆집의 젊은 아낙도 겨울 문안이 꽤 수다스럽다.
“에구. 이 마누라 보고 싶어 혼났구먼. 우찌 지낸 겨? 나, 안 보고 싶었남?”
“돈 생각이 나서 우찌 지냈댜? 그 손 잡아매고 용케도 참았네.”
“그렇잖아도 ‘이젠 내려올 때가 됐구먼’ 했지.”
반갑다는 넋두리도 가지가지다. 고맙지 아니한가.
“보고 싶다는 건 거짓말이지. 윗층으로 올라오면 볼 것을.”하니,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영감님 계시니께 벨을 못 누르겄더라구.”한다. 착한 내 영감 탓은 왜 하누.
그러고 보니 모두 영감님이 없는 과부댁들이다. 적적해서 어떻게 지냈을꼬. 아직 경로당 출입은 마다하던 그녀들이 아니신가.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구먼. 난로라도 피우고 아래층으로 끌어들였어야 했을 것을.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그랬음 좋았을 걸.
“바지 하나 하자. 요새 입는 걸루.”
“요새 입을 천은 이집에 많지.”
“여기 이것두 좋구. 저것두 색이 좋구먼.”
그들은 우리 의상실의 단골들이다. 줄잡아서 30년은 넘었겠다. 참 습관이란 게 무섭다. 한 번 드나들기 시작하면 다른 곳은 못 가겠다 한다. 속을 것만 같고 무섭기까지 하다 한다. 아니, 그녀들은 습관이 아니라 ‘의리’라고 고집한다. 내 쪽에서 생각할 때엔 참 고마운 일이지.
“이건 걸려 있은 지가 한참 된 것 같은데. 임자가 없는 옷인 갑다. 주인장 것이여?”
“여름에 입으려고 하나 했는데 입고 나설 데가 없어서 묵혔어.”
“어디 내나 입어보자. 맞으면 이건 내 거다. 저 여자 건 내게 다 맞더라구.”
참 요상하다. 내 것이라 하면 뭐가 별 난 줄 안다. 더 잘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반대다. 좀 삐뚤어져도 귀찮아서 그냥 입고, 대충 살펴서 걸치기가 예사인데 말이지.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은 입을 모아 웃어댄다. 하하하 내 손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오늘 수입이 제법 괜찮은데?! 보림이와 약속한 어린이날의 자전거 선물 값은 벌었구먼. 아니, 세돌이(애완용 푸들 강아지)가 털이 장하던데, 미용값까지도 되겠는 걸? 아직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수입으로 쓸 구멍을 먼저 만든다. 그렇다 하니, 지인들이 ‘그게 사람 사는 재미’란다.
그동안 너무 바쁘고 지쳐서, 아무 일 없이 손을 놓고 멍청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가봉 날짜에 쫒기고 완성 기일에 맞추느라고, 나 스스로에게 ‘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내린 지가 오래다. 그런데 한 겨울 나기가 지겨워서,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뛰어들고 있다.
일 없이 넋 놓고 살아봐도 별 재미가 없더란 말이지. 부르지 않은 병만 들러붙고 반갑지도 않은 노화로 고심하고. 이런 저런 병에 저런이런 고민만 불어난다. 언제쯤 세상을 이별할까를 점치며, 주판알을 굴리는 건 참 무모한 짓이다. 그냥 사는 날까지 살아주는 게 현명하지.
식도암? 그거 수술 잘 돼서 완치판정 받았잖은가. 녹내장? 백내장? 그건 내가 고민한다고 낫는 건 아니지. 처방전에 따라 점안하고 먹으라는 대로 약은 먹어주면 되구. 당뇨? 것도 아직은 ‘전단계’라니 상식껏 식이요법 하구. 관절염? 치료할 시기가 지났다고 스트레칭만 하라네.
저혈압? 까이 것. 시방 빡시게 검사 중이니 의사의 처방대로 잘 지켜주면 되는 거고. 또 뭐가 달라붙었나? 내가 고민하고 속상해 한다고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 머리로 고민하는 건 이제부터 아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자. 주치의의 명령만 따르면 된다 이거지.
그러고 보니 내게 달라붙은 병은, 시방 당장 죽을 만 한 건 아니구먼.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일찍 드러눕지는 말자. 아니, 드러눕기 전까지 활동은 해야겠군. 걸어서 화장실 다니고 병원도 도움 받지 말고 다녀야 할 터인데 그것만 문제삼자. 그게 런닝만으로 해결이 될까?
그래. 내가 홀로설 수 있을 때까지만 살기로 하자. 아무개 할매는 딱 일주일 누웠다가 갔다지? 그래. 나도 일주일쯤은 효도를 받아도 족(足)하지. 이쁜 모습으로 자는 듯 그렇게 가자. 아이들이 영원히 “고운 모습”으로 기억하게 말이지. 음~. 역시 나는 끝까지 만석(萬石)이로세.
보림아~!
할미 글을 다시 읽어 보니께 내용은 슬픈디, 근디, 기분은 상쾌하니 워쩐 일이랴?
할미가 눕기 전까지 보림이 용돈을 벌어 줬으믄 쓰겄는디….
통장에두 없지만서두 있는 걸 주는 거 말구, 벌어서 즉각즉각 주고 싶어 야~.
오늘부텀 그리 기도할 겨. 그라고 실천도 해야쥐.
할매가 할 줄 아는 게 그것 뿐일 걸 워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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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화원'에 '분홍빛 봄'이 시작 되었습니다. 마당가득 꽃잔디 향기가 가득합니다.
ㅋㅋㅋ 화원은 무신... 손바닥만한 마당이지만 이왕이면 근사하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톳나물이 우연히 자랐기에 새콤달콤 무쳐봤더니 맛이 있었어요. 봄이 이렇게 오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왕이면 우렁찬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님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