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와~. 완연한 여름이다. 다행히 가게가 지층이라 이제까지는 그리 더운 걸 몰랐더니. 밖에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휴~. 땀이 절로 흐른다. 햇빛이 너무 강열해서 썬그라스가 필수다. 나처럼 눈에 하자가 많은 사람에게는 말이지. 눈의 하자를 얘기했으니 오늘은 내 눈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아니, 눈 때문에 삶의 지침이 바뀐 이야기라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나는 원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손이 크다는 소릴 듣는다. 내 시어머님도 말했다.
“저 사람이 쳇수는 작아도 손이 커요.”
하나만 줘도 족한 것을 두 개를 엎어 줘야 직성이 풀리고, 그릇이 작든 크든 채워 줘야 내 마음에 찬다. 있어서 나누는 것이니 뒷탈이 날 것은 없지 않은가.
주는 마음도 그렇지만 일감에 대해서도, 내 가게에 들어서는 사람을 마다하는 법이 없다. 날밤을 새워서라도, 손님이 원하는 날짜에 완성을 하곤 한다. 그러니까 손님이 원하는 날짜가 너무 촉박하다고 내 보내는 법이 없다는 말이지. 그래서 종업원의 원성을 사기도 했으나 그들이 손을 놓으면 내가 달려들어 작업을 하면 되니까. 나는 옷을 만드는 일에 만은 만능이니까. 하하하.
그 버릇이 일흔을 넘긴 시방에도 계속된다. 이것이 얼마짜리 작품이라는 계산은 없다. 그냥 내 가게에 들어온 손님의 희망을 충족시킨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결과론적으로는 주머니가 채워지기는 하지만, 요새로는 육신이 피곤하고 시원찮은 눈에 무리가 온다. 들어서는 손님을 선별해서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묘책을 강구해야 했다.
욕심을 줄이자. 수선할 일감을 받지 말아야겠다. 나는 원래 수선방의 아줌마가 아니질 않는가. 그러나 요즘 누가 맞춤옷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까지의 결산으로 보아 수선료는 맞춤에 비해 ‘새 발의 피’다. 비교하자면 작업은 맞춤의 서너 배로 힘이 든다. 옳거니. 그래야겠다. 수선하는 일을 그만두자. 한 달에 하나의 손님을 받아도 족하자. 그게 내 체력의 한계다.
결국 ,<폼 하우스> 라 써붙인 간
좋다. 참 좋다. 살다보면 길을 바꿀 수도 있는데, 그 길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럴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 무지 좋다. 내게 그런 저력이 있음이 좋다는 말씀이지. 이젠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자. 이 여건에 감사하고 아직도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감사하자. 이게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자~. 이제부터는 살아있음에도 감사하며 살자꾸나.
아직도 나를 찾는 청중은 많다. 이 또한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노인대학>에서 고양강좌를 맡아 열변 중입니다요^^
보림아~!
이만만 혀도 할미 멋지지 않은감?!~ ㅋㅋㅋ.